이승택 '묶기' 연작…노끈으로 추앙한 사물×예술의 '해방 일지'
갤러리현대, 이승택 (Un)Bound'전 25일 개막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노끈 하나면 됐다. 돌도 묶고, 항아리도, 책도 묶었다. 그랬더니 달라졌다. 노끈을 추앙한 설치미술가 이승택(90)은 사물과 예술의 '해방 일지'를 제대로 써냈다. 깎지도 파내지도 않고 묶기만 한 '비조각'. '비미술'로 승리했다. 기성 조각의 문법을 타파한 '한국 전위미술 선구자'로 한국 현대미술사에 기록됐다. 1960년대 실험 삼아 선택한 재료 '노끈'은 당시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옵아트에 대한 이승택만의 반응이었다. 1972년 독일문화원 '현대조각초대전'을 통해 세상에 처음 공개된 '노끈 시리즈'는 캔버스를 벗어나 끝없이 변주됐다. "어떤 사물이나 소재건 묶기만 하면 묘하게도 본래의 형상들이 새롭게 느껴진다." 무엇을, 어디에 묶든 '묶기'는 이승택만의 차별화로 세상에 둘도 없는 색다른 예술이었지만, 처음엔 알아주지 않았다. '화단의 이단아'로 불렸다. "묶기의 도구로 사용되던 ‘노끈’의 입체적인 선이 가진 유연하고 유기체적인 물질성에 매료됐다." 실제로 노끈으로 묶인 사물들은 기하학적 패턴으로 진동하면서 입체 추상을 만들어낸다. “묶은 물리적인 힘의 자국을 남기는 일은 반전의 트릭을 즐겨 쓰는 내게 유용한 전략이었습니다." 그는 2020년 세계적인 미술평론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노끈 전략, 그러니까 '묶기' 시리즈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묶기’라는 행위는 재료의 물성에 대한 착시를 일으키며 생명력에 대한 환영을 불러오는 효과로 연결되어 점점 더 이 작업 과정에 몰두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전통 조각의 개념을 거부하며 획득한 '노끈의 전략적 예술'은 뒤늦게 알려졌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미술상을 수상하면서다. 국내외 평론가들은 극찬을 쏟아냈다. 국내 대표 평론가 오광수는 이승택의 작업은 조각의 전체적인 변혁의 수준에서 벗어나 돋보이며, ‘묶음’ 작업은 1960년대에 등장한 개념미술이나 미니멀리즘 작품과도 구별된다고 평가했다. 미술사학자 조앤 기(Joan Kee)는 2013년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rchives of Asian Art) 저널에 발표한 “Use on Vacation: The Non-Sculptures of Lee Seung-taek”에서 이승택 작업 세계의 미술사적 의의를 다각도에서 논의한 바 있다. 그는 "‘설치미술’이라는 개념조차 없고 대부분의 조각 작품이 좌대에 놓이는 방식으로 전시되던 1960년대에 이승택은 남다른 스케일의 작품을 바닥에 놓거나 벽과 천장에 매다는 형식을 택한 점에서 한국 설치 미술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고 추켜 세웠다. '한국 설치 미술의 기원'으로 추앙된 그는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이승택-거꾸로, 비미술'전을 열며 그의 방대한 작품세계를 집중 조명한 바 있다.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았다. 거꾸로 생각했다. 거꾸로 살았다"고 일갈한 그의 '거꾸로 정신'이 세상에 통쾌하게 알려졌다.
'한국 전위미술 1세대'로 통하는 이승택의 '묶기 시리즈'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는 이승택의 개인전 '(Un)Bound[(언)바운드]'를 25일 개막한다. 작가의 개념을 물질적으로 시각화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노끈이 주요 매체로 등장하는 '묶기(bind)' 연작, 노끈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매어진 흔적을 간직한 다채로운 작품, 묶기의 개념이 한없이 자유로워진(unbound) 캔버스 작품에 집중했다. 이승택의 4번째 개인전을 연 갤러리현대는 "이번 전시를 통해 1960~1970년대 시대 상황 속에서 미술로 세상을 거꾸로 보고, 거꾸로 사고하고, 거꾸로 살아내며 한국 현대미술의 새 지평을 열고자 했던 이승택 작가의 야심 찬 비전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설치미술가 이승택은? 1932년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한 그는 1964년에 전위적 조형성을 추구한 '원형회'에 합류하며 조각전의 형식을 혁신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서구의 근대적 조각 개념에서 벗어나 ‘비조각’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 전위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 대신 옹기, 고드랫돌, 노끈, 비닐, 각목, 한지, 책 등 일상의 재료나 물건을 활용하여 조각의 경계를 실험해왔다. 1970~1980년대에는 일상의 오브제를 비롯한 다양한 재료와 형태의 ‘묶음’, ‘해체’ 시리즈 작품으로 꾸준히 전시에 초대됐다. 기성 미술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도전과 예술 실험은 1980년에 ‘비조각’이라는 개념으로 정립되고 연기, 바람, 불, 물 등 비물질 재료의 시각화 작업을 선보였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미술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 국립현대미술관(2020), 런던 화이트 큐브 갤러리(2018), 뉴욕 레비고비 갤러리(2017), 갤러리현대(2015, 2014) 등 국내외 주요 기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시드니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구겐하임 아부다비, 홍콩 M+,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소마미술관 등 세계의 주요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