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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필름]있는 그대로 걸작으로 '브루탈리스트'

등록 2025-02-12 06:01:00   최종수정 2025-03-04 09: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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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루탈리스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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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영화 '브루탈리스트'(2월12일 공개)는 시대를 역행해 영화의 존재 의미를 증명한다. 온 세상이 도파민을 외치며 즉각적인 자극에 탐닉할 때 브래디 코베(Brady Corbet·37) 감독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도달하려는 경지만 바라보며 최적의 속도로 나아간다. 러닝타임 215분, 서곡과 인터미션, 비스타비전과 70㎜ 필름 카메라 촬영. 그리고 오리지널 각본. 이 작품은 한 때 영화라면 으레 해야만 했던 것들을 공들여 수집해 바로 지금 영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 간다. 조급해 하지 않고 천천히 쌓아 올리며 정교하고 치밀하게. 극 중 라슬로 토스는 말한다. "내 건축물은 전쟁을 견뎌 살아 남았고 앞으로도 세대를 넘어 살아갈 겁니다. 내 건축물은 어떤 침식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됐습니다." 이건 흡사 영화를 만드는 코베 감독의 태도가 아닌가. 말하자면 '브루탈리스트'는 클래식을 갈망하는 걸작이다.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라슬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가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번 사업가 해리슨 밴 뷰런(가이 피어스)을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브루탈리스트'는 웬만한 영화에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야심으로 그득하다. 가상 인물 라슬로 토스의 곡절 많은 인생엔 아픈 역사가 있고, 예리한 철학이 있다. 예술의 순수와 자본의 잔인이 있고, 건축으로 비유된 영화와 영화를 기어코 압도하려는 건축이 있다. 쇠퇴하는 시대의 자격지심과 떠오르는 시대의 열등감, 나약하기 만한 사랑과 강인하나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랑이 있다. 삶의 공허와 아이러니가 있다. 코베 감독은 이 모든 걸 아우르는 형식과 기술로 찰나의 폭발과 영원의 울림을 동시에 겨냥한다. 215분은 길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브루탈리스트'에만큼은 정합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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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얘기부터 해야 한다. 브루탈리스트(brutalist)란 무엇인가. 당연히 이 말은 브루탈리즘(brutalism)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브루탈리즘은 20세기 중반을 지배한 건축 양식.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솔직함'이 핵심이다. 재료를 드러내고, 장식을 최소화해 단순화하며,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건물 자체를 경험케 하는 게 특징이다. 노출 콘크리트, 거대한 덩어리, 빛과 그림자는 브루탈리즘을 상징한다. 주인공 토스는 브루탈리즘 건축가이고, 그가 극 중 인생을 바쳐 완성하려는 작품 역시 브루탈리즘 건물이다. 그러니 '브루탈리스트'라는 제목은 당연히 토스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 영화는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브루탈리즘 철학으로 토스의 삶 전체를 꿰어낸다. 그러면서 이 남자를 있는 그대로 두지 않으려는 역사와 시대와 관계와 시각을 통찰한다.

'브루탈리스트'는 바로 그 브루탈리즘으로 이민자 아메리칸 드림을 직격한다. 어쩌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건 주입된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 아메리칸 드림은 이민자가 생각한 적도 없는 꿈을 꾸게 강제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뒤흔들고 그들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없게 한다고 지적한다. 토스는 그저 생존을 위해 대서양을 건넜고, 그가 원했던 건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 조피아를 다시 만나는 것 뿐이었다. 건설 현장 허드렛일이나 건축 도면 그리는 일 따위도 불평 없이 받아들인 그를 천재로 추앙하며 꿈을 펼치라고 충동질 한 미국인 밴 뷰런이었다. 그리고 밴 뷰런은 토스를 후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꿈을 쥐고 흔들며 토스의 삶을 구원과 나락을 끊임없이 오가는 격동에 빠뜨린다. 미국에 도착한 토스가 처음 마주한 건 자유의 여신상. 어찌된 일인지 이 미국의 상징은 거꾸로 뒤집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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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베 감독은 세뇌된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코멘트를 예술과 자본의 격렬한 공생 관계로 확장한다. 예술은 돈에 깃든 힘으로 생존을 보장 받으려 하고, 돈은 예술에 서린 결백으로 공허를 견디려 한다는 것. 토스로 의인화 된 예술은 고고하고 순수하나 여리고 나약하다. 밴 뷰런으로 형상화 된 자본은 당당하고 거침없으나 잔혹하고 변덕스럽다. '브루탈리스트'는 예술과 자본은 서로에게 오만하면서도 굴종적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엔 예술의 손을 들어주며 있는 그대로 존재하려는 예술을 자본이 착취하고 변형해 굴복시키려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돈은 예술의 영속을 질투하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토스는 예술과 함께 영원히 살지만 밴 뷰런은 돈과 함께 소멸되니까. '브루탈리스트'는 이 관계를 거대 자본이 투입돼야 하는 건축 예술로 드러내는데, 이건 돈을 가장 가까이 둔 예술인 영화에 관한 메타포로 보이기도 한다.

'브루탈리스트'는 아메리칸 드림과 자본을 조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오니즘마저 냉소한다. 토스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건 미국의 성공 신화이기도 하고 돈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그의 삶을 멋대로 재단해서 평가하는 바로 그 유대주의이기도 하다. 토스의 재능과 밴 뷰런의 야심과 지역 사회 요구가 혼재된 그 건축물은 훗날 토스의 동포들에 의해 홀로코스트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그 의미가 변형·변질돼 있다. 이를 비웃듯 코베 감독은 건물 각 부분이 가진 의미를 시오니즘에 기반한 시각으로 해설하는 토스 조카 손주의 모습에 이런 코멘트를 단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순히 존재할 뿐이다." 늙고 병든 토스가 휠체어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브루탈리스트'는 개인을 일반화·범주화하고 속박하고 옭아매려는 그 모든 시도와 사상과 수단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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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이야기를 아우르는 '브루탈리스트'는 마치 브루탈리즘 건축물 같이 우뚝 선다. 이 길고 깊고 복잡한 얘기들을 어느 것 하나 돌출되지 않게 매끈하고 거대한 한 덩어리 안에 담아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직후 급격한 패러다임 변화와 함께 부상한 미국이 유럽에 가진 열등감, 쇠퇴하는 유럽이 미국에 가진 자격지심이 있다. 시간과 공간과 경험을 압도하려는 토스와 에르제벳의 관계와 사랑도 있다. 기념비를 세우려던 밴 뷰런은 몰락하고, 그저 잘 살아보려던 토스가 기념비 같은 존재가 되는 건 허무와 아이러니가 뒤엉킨 전통적 비극이기도 하다. 그리고 롤 크로울리의 촬영과 대니얼 블럼버그의 음악은 이 모든 이야기들을 떠받들어 실감하게 한다. 이 영화는 잊히기 힘든 장면으로 쉬지 않고 번쩍이고, 귓속을 떠나지 않는 음악으로 내내 울려댄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파아니스트'(2002)에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슈필만을 연기해 2003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역대 최연소인 29살에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애드리언 브로디는 또 한 번 홀로코스트 생존자 역할을 맡아 필모그래피 최고 연기를 했다. 실제로 헝가리계 유대인인 브로디는 라슬로 토스라는 인간의 위대함과 나약함, 겸손과 오만, 위선과 위악은 물론이고 시대가 안겨준 고통과 그 고통이 유발한 트라우마를 가슴에 품은 듯 연기한다. 일각에선 '브루탈리스트'가 인공지능(AI) 기술로 그의 발음 일부를 보정한 걸 두고 진짜 연기가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으나 자유의 여신상을 마주한 토스의 감격, 사촌 아틸라를 끌어안으며 흘리는 눈물, 모진 세월 탓에 변해버린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억양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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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스트'는 오는 3월2일에 열리는 9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감독·각본·남우주연(애드리언 브로디)·남우조연(가이 피어스)·여우조연(펠리시티 존스)·편집·음악 등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앞서 골든글로브에서 작품·감독·남우주연상을 받아 오스카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브루탈리스트'가 오스카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얼마나 많은 오스카를 품에 안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카데미 수상 여부가 이 영화의 가치를 결정할 순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영화계가 싫어하고 극장업계가 꺼리는 3시간 35분짜리 영화, 인터미션이 15분 포함된 이 영화를 유튜브·인스타그램·틱톡이 장악한 시대에 내놓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두고 두고 회자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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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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