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정유년(丁酉年), 닭 이야기
‘심청전’의 한 대목이다. 심청이가 뱃사공에게 팔려 가기로 약속한 날 새벽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슬퍼하는 내용이다. 새벽을 알리는 시보(時報)인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닭이 울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한탄이 들어 있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닭의 울음소리로 시간을 짐작했다. 특히 과거에는 조상을 모시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닭의 울음소리를 기준으로 뫼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 닭이 제때 울지 않거나 울 때가 아닌데 울면 불길하다고 여겼다. ‘닭이 초저녁에 울면 재수가 없다’ ‘한밤중에 울면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 ‘해가 진 후에 울면 집이 망한다’ 등이 보기다. 2017년 정유년(丁酉年), 닭의 해다. 닭은 십이지의 열 번째 동물로 을유(乙酉)·정유(丁酉)·기유(己酉)·신유(辛酉)·계유(癸酉) 순으로 육십갑자를 순행한다. 방위로는 서(西)쪽의 수호신, 시간으로는 오후 5~7시, 달로는 음력 8월(陰), 계절은 중추(仲秋), 오행은 금(金), 음향은 음(陰)에 해당한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의 도움말로 닭의 다양한 면을 알아봤다. ◇‘닭의 나라’ 신라·고구려 닭은 고대부터 기른 것으로 추론된다.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지’ ‘동이전’ 등에서 닭에 대한 기록이 발견된다. 닭이 한국문화의 상징적 존재로 그려진 곳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박혁거세(BC 69∼4)와 김알지 설화(서기 65년)다. “이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에서 계룡(雞龍)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로부터 동녀(童女)를 낳으니 자색이 뛰어나게 고왔다. 그러나 입술이 닭의 부리 같은지라…” “9년 봄 3월 밤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의 시림(始林) 나무들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 살펴보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궤짝을 열어보니 작은 남자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자태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왕은 그에게 알지(閼智)라 이름을 붙여줬다.” 신라는 국명이 정해지기 전 나라 이름이 계림(鷄林)이라 할 정도로 닭과 연관이 깊었다. 신라의 유물 중에는 새의 형상을 한 토기가 출토되기도 했는데, 그 일부는 닭의 형태다. 경주 천마총에서는 수십 개의 달걀이 들어 있는 단지가 발견됐다. 고구려도 닭을 숭배했다. 무용총 천장에 닭 한 쌍이 그려져 있고, 천축국(인도)에서는 고구려를 계귀국(鷄貴國)으로 불렀다. 신라왕이 고구려 사람들을 공격할 때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은 이를 뒷받침한다. 천 관장은 “고려 때는 세말에 집 안의 잡귀를 몰아내고 정하게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축귀 행사의 하나인 나례의 공양물로 채택됐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본초강목에는 ‘조선 닭이 좋다 하여 중국의 세력가들은 조선에까지 가서 닭을 구해간다’라고 적혀 있다”고 전했다. ◇태초의 소리 ‘닭의 울음’, 귀신 쫓는 ‘닭의 피’ 닭은 ‘주역’의 팔괘에서 손(巽)에 해당한다. 손의 방위는 여명이 시작되는 남동쪽이다. 천 관장은 “닭은 새벽을 알려주는 신비한 영물로서 태양의 새였다. 아울러 무속 신화나 건국 신화에서 닭 울음소리는 임금의 탄생이나 천지개벽을 알리는 태초의 소리였다”고 했다. “태초에 천지는 혼돈이었다. 하늘 머리가 자(子)방으로 열리고 땅의 머리가 축(丑)방으로 열려 하늘과 당 사이에 금이 생겼다. 이때 하늘에서 청이슬이 내리고 땅에서 흑이슬이 솟아나 서로 합수되어 음양상통으로 만물이 생겨났다. 견우성·직녀성·노인성·북두칠성·삼태성이 자리를 잡았으나 어둠은 계속되었다. 천황닭이 목을 들고 지황닭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이 꼬리를 쳐 우니 갑을 동방에서 먼동이 뜨기 시작했다. 옥황상제 천지왕은 하늘에 해도 둘, 달도 둘을 내보내어 천지가 개벽(開闢)되었다.”
사람들은 닭의 울음소리로 어둠과 귀신의 시간, 빛과 인간의 시간을 나눴다. 귀신은 빛을 무서워하며 밤에만 활동하는 존재이고, 닭은 어둠이 걷히고 빛이 지배하는 시간이 다가옴을 알린다. 그래서 닭 울음소리만 들리면 도깨비나 귀신들은 일제히 자취를 감춰버린다. 사람들에게 닭이 나쁜 정령을 쫓고 귀신을 제압하는 상서로운 동물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귀신을 쫓을 때 닭 그림을 걸어놓거나 닭 피를 뿌리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닭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했다. ‘동국세시기’를 보면 정초에 닭이나 호랑이 등을 많이 그린 세화를 집 안에 붙여 액을 몰아내는 풍속이 있었다. 또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닭울음점인 ‘계명점(鷄鳴占)’이 있었다. 대보름달 꼭두새벽에 첫닭이 열 번 이상 울면 그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두 번째나 세 번째 닭 울음소리는 소용이 없다고 한다. ◇닭, 더위를 이기는 음식 닭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여름철 대표 보양식이다. ‘동의보감’에는 닭고기는 오장을 안정시키고 양기를 돕는다고 기록돼 있다. 매년 복날만 되면 삼계탕 전문 음식점들은 문전성시를 이룬 것도 이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음력 6월 20일이 ‘닭 잡아먹는 날’이다. 중복과 말복 사이 연중 가장 더위가 심한 때다. 여자는 수탉, 남자는 암탉을 잡아먹어야 효험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제주도에 이런 풍속이 생긴 이유를 알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전해온다. 옛날 어느 고을에 늙은 부모님을 모시는 효자가 살고 있었다. 노부모는 더위가 닥쳐오면 입맛이 없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노쇠한 데다 식사마저 제대로 못해 날로 여위어가는 부모를 보자 효자는 애간장이 탔다. 그래서 어찌하면 부모님이 무더운 여름을 잘 견딜까 고민하다가, 삭풍이 몰아치는 바위 위에 앉아 겨울 신에게 여름의 더위를 몰아내 달라고 기도를 했다. 어느 날 밤, 효자의 효성에 산신이 감동한 것인지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백발노인은 효자에게 한 쌍의 새를 주면서 “이 새를 집에 가지고 가서 잘 기르되 알을 낳거든 모아두었다가 춘분과 청명한 날 어미 새에게 안기거라. 그리고 그 새끼들이 자라서 새벽녘에 우는 새가 있거든 그날 아침 곧 잡아서 어머니께 드리고, 그렇지 않은 놈은 아버지께 드리면 여름철에 더위에 쫓기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백발노인은 “늙은 부모를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나 내 힘으로는 여름의 더위를 몰아낼 수가 없으니 이 새를 잘 기르도록 하여라”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새는 다름 아닌 닭 한 쌍이었다. 닭 한 쌍을 받은 효자는 노인의 말대로 닭이 낳은 달걀을 모아두었다가 춘분이 되자 모아둔 알을 꺼내 어미 닭에게 안겼다. 그리고 그 새끼가 자라 새벽녘에 소리 높여 울자, 그놈을 잡아서 어머니께 드리고 그렇지 않은 놈은 아버지께 드렸다. 그랬더니 그 여름은 아주 몸 성히 지낼 수가 있었다 한다. 이때부터 여름철이면 더위를 이기기 위해 닭을 잡아먹고 몸을 보신하는 한여름 풍속이 시작됐다. ◇씨암탉과 새신랑 예로부터 반가운 손님이 오면 닭을 잡아 대접했다. 특히 농촌에서는 대부분 닭을 길러 언제든지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사위가 처가에 가면 꼭 먹는 것이 씨암탉이었다. 장모에게 가장 귀한 손님은 사위였고, 딸을 잘 부탁한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씨암탉을 잡았다. 씨암탉을 잡는다는 것은 병아리를 깔 수 있는 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고, 집안의 중요한 재원 하나를 버린다는 의미라고 천 관장은 설명했다. 손님으로 가서 그 집의 씨암탉을 얻어먹었다면 최고의 대접을 받은 셈이다. 씨암탉이 낳은 달걀은 친척의 생일이나 결혼, 환갑 때 짚으로 달걀 꾸러미를 싸서 부조했을 정도로 귀하게 여겼다. 닭은 알을 하루에 하나밖에 낳지 않아서 매일 모아뒀다가 10개가 되면 한 꾸러미를 만들었으니, 모으는 마음의 정성 또한 대단했다. 결혼식 초례상에는 반드시 닭이 필요했다. 신랑 신부가 초례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서서 백년가약을 맺을 때, 닭을 청홍 보자기로 싸서 상 위에 놓거나 동자가 안고 옆에 서 있었다. 닭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하는 것이다. 옛날 나라의 임금들이 서로 서약을 할 때 말 피로 맹세했다고 하는데 부부 인연의 서약은 닭으로 했다. 혼인 의례가 끝나고 신부가 시댁 쪽에 폐백례를 드릴 때도 닭고기를 놓고 절을 한다. 이처럼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중요한 평생 의례인 혼인에 닭이 등장하는 것은 닭을 길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