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占치는 사회①]'占'에 미래를 묻다
'클릭 한 번에'… 디지털 점(占) 전성시대 내 운명은 내가 본다…셀프 역술인 증가 【서울=뉴시스】박성환 기자 = "비가 계속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떠한지 염려하였다. 척자점을 해보니 '군왕을 만나보는 것과 같다(如見君王)'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如夜得燈)'는 괘가 나왔다….” 충무공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 중 '1594년 7월13일'의 한 대목입니다. 난중일기에는 충무공이 직접 '척자점(擲字占)'을 친 대목이 17회가량 나옵니다. 이 중 14회는 직접 쳤고, 3회는 점쟁이를 시켰습니다. 척자점은 나무 막대인 윤목(輪木)을 던져 괘를 만들어 길흉을 확인하는 것으로, 오늘날 '윷점'을 말합니다. 충무공은 자신의 입신양명이나 부귀영화를 위해 점을 치지 않았습니다. 전투의 승패가 궁금하거나 고향에 남겨둔 아내와 아들이 걱정될 때, 후원자 유성룡이 아플 때 점을 쳤습니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전장에서 군사를 이끌고 용맹을 떨쳤다지만 충무공 역시 한 사람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자기 확신을 위한 과정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이 하도 급히 돌아 당장 내일을 내다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고단한 현실을 기꺼이 감내하며 장밋빛 미래를 꿈꿉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입시, 취업, 결혼, 선거…. 나열하기도 벅찹니다. 늘 그렇듯 삶은 예측불허입니다. 전쟁보다 더 전쟁 같은 녹록지 않은 현실을 살다 보면 미래는 늘 불안하고 초초합니다. 다들 미래를 알고 싶어 합니다. 미래를 읽어내는 방법 중 하나가 점(占)입니다. 코앞에 닥친 오늘은 고사하고, 과거사 진위도 제대로 규명 못 하면서 앞날을 내다본다니. 여전히 썩 내키지 않습니다.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점치는 행위는 원시적인 미신에 가깝습니다. 정말 미래를 알면 운명이 바뀔까요. 확신할 순 없지만, 이 물음에 답을 구하겠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부침이 있기에. '점(占)'집이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세시(歲時)부터 어김없이 점을 통해 한 해의 길흉화복을 예단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는 장기화한 경기 불황과 취업난, 대선까지 겹치면서 점집이 여느 해보다 특수를 누린다. 개인 신상 문제부터 취업, 결혼, 회사 운영까지 점을 보는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과거 점집에는 자녀 이름을 짓거나 가족 일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중·장년층이 주요 고객이었다. 어쭙잖은 무속인이 효험이 있다며 부적을 쓰거나 굿을 부추겨 각종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다. 최근 점 보는 20~30대 청춘이 늘면서 대학가 중심으로 점집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반갑지 않지만 취업난과 고용불안, 결혼, 미래의 불확실성이 청춘들의 발걸음을 점집으로 향하게 하고 있다. 청춘들이 모이는 곳마다 사주나 타로 등 점을 봐준다는 카페나 노점상이 우후죽순처럼 늘고 있다. 점 종류도 가지가지다. 신점뿐 아니라 사주나 관상, 손금, 타로, 별자리 운세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또 스마트폰으로 손가락 몇 번 까딱하면 굳이 발품을 팔지 않아도 점괘를 받아 볼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과 인터넷 사이트가 넘쳐난다. 불확실한 미래를 엿보려는 사람들, 동시대를 사는 우리의 자화상일 수 있다. ◇'하소연할 데도 없는데'…점, 불안한 청춘을 위로하다 "답답하고 불안할 때마다 여기 와서 좋은 말을 많이 들으면 위안이 돼요." 대학 졸업을 한 학기 뒤로 늦춘 황정연(26·여)씨는 말끔한 정장 차림의 역술인이 생년월일을 묻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답답할 때면 사주를 본다는 황씨는 역술인에게 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펴 보였다. 역술인은 손금을 유심히 살피더니 흰 종이에 알 수 없는 한자들을 줄줄이 적었다. 한참 만에 점괘를 풀어낸 역술인에게 황씨의 시선이 꽂혔다.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황씨는 역술인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6월에 길이 활짝 열리니 취업할 수 있어…." 자기 생각과 달리 의외의 점괘가 나오자 황씨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숨죽였다. 역술인이 점괘를 풀어낼 때마다 황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황씨는 "100곳 넘게 입사 원서를 내고 2곳에서 최종 면접까지 봤는데, 취업에 실패했다"며 "답답한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을 점을 보러왔고, 점괘가 생각보다 괜찮아 다시 희망이 생긴다"고 말했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수동의 한 사주 카페.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흔한 카페 풍경이 펼쳐졌다. 특이한 점이라면 카페 한편에 '사주·관상·손금·타로'라는 푯말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맞댄 채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젊은 사람들로 카페는 북적였다. 테이블마다 타로와 '당신의 미래가 보입니다'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진 안내 전단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카페에는 역술가 5명이 손님들의 요청에 따라 점을 봐준다. 복채는 3000~1만원 선. 점을 보는 방식과 횟수에 따라 복채 액수가 달라진다.
대학 졸업 후 중소 IT업체에 입사한 성모(31)씨는 "취업이 급해 일단 입사는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이직이나 재취업을 고려한다"며 "어디 하소연할 데도 마땅치 않고, 답답한 마음에 혹시나 해서 사주를 봤다"고 토로했다. 성씨는 "점괘가 맞는지 틀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속내를 털어놓으니 답답한 마음이 어느 정도 풀렸다"며 "비록 비과학적이지만, 분명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박수현(26·여)씨도 "워낙 취업이 안 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지만, 된다는 보장이 없어 하루하루가 답답하다"며 "절박한 심정으로 점을 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전했다. 역술가들은 점을 보는 젊은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입을 모았다. 역술가 최용회(44)씨는 "아무래도 취업하기가 어느 때보다 힘든 현실 때문인지 점을 보러 오는 젊은 사람이 많아졌다"며 "대부분 취업이나 진로 고민을 털어놓거나 하소연하는 경우가 많아 다 들어주고 희망적인 점괘를 꼭 얘기해준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점집에 몰리는 이유에 관해 예상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한 심리가 반영된 세태라고 지적한다. 꽁꽁 얼어버린 취업 시장, 불안하고 초조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심리적 위로와 치유를 받기 위해 청춘들이 점집 문을 두드리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점괘 '술술'…디지털 점쟁이 시대 직장인 박종훈(33)씨는 매일 아침 습관적으로 일어나자마자 침대 옆에 놓아둔 스마트폰을 든다. 곧바로 ‘오늘의 운세'를 알려주는 앱을 켠다. 아내의 핀잔에도 박씨는 습관적으로 오늘의 운세를 훑어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박씨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운세부터 보게 된다"며 "운세가 좋게 나오면 기분이 상쾌하고, 나쁜 운세가 나오는 날에는 스스로 조심하게 된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어 "굳이 발품을 팔지 않고, 어렵지 않게 운세를 볼 수 있어 만족한다"며 "한 달에 한 번 인터넷으로 유로 운세를 보는데 역술인이나 무당을 만나야 하는 부담도 없고, 가격도 저렴하다"고 덧붙였다. 시대가 변했다. 점 시장도 디지털 기반을 등에 업고 '영역' 확장이 한창이다. 실제 스마트폰 앱 마켓에서 운세나 궁합, 사주팔자, 토정비결 등 점과 관련된 단어로 검색하면 1000개가 넘는 앱이 검색된다. 이 중 무료 앱은 250만 명이, 1만원 안팎의 유료 앱은 1만 명 가까이 자신의 스마트폰에 내려받았다. 인터넷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점과 관련된 단어를 검색창에 입력하면 셀 수 없을 정도의 사이트가 쏟아진다. 또 자신이 원하는 날짜와 시간, 장소로 역술가를 불러 점을 칠 수 있는 이른바 '출장 서비스'도 가능하다. 직장인 권송이(32·여)씨는 "호기심에 사주풀이 앱을 몇 번 이용했는데, 저장 기능도 있어 두고두고 볼 수 있어 만족한다"며 "무엇보다 무료라 재미 삼아 습관적으로 보게 된다"고 말했다. 역술인 한모(51)씨는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만 받아서는 먹고 살기 힘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며 "손님이 원하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서 점치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밝혔다. ◇"스스로 내 운명 보다"…직접 역술 배워 흔히 도령이나 보살, 역술가들을 세간에선 '점쟁이'라 뭉뚱그려 폄하된 적이 있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대접도 형편없었다. 흔히 말하는 점집 역시 골목 안쪽 깊숙한 곳에서나 볼 수 있었다. 점집을 상징하는 깃발이 골목에 나부끼면 돌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층을 중심으로 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서서히 걷히면서, 역술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이들이 늘고 있다. 웹디자이너 김보경(28·여)씨는 일주일에 한 번 역술을 배우는 스터디 모임에 참석한다. 김씨는 "굳이 역술가가 되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호기심 때문에 시작한 독학이 이제는 스터디 모임까지 할 정도"라며 "처음에 미신이라고 여겼는데, 공부하면 할수록 미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역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카페를 중심으로 모인다. 실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는 역술 관련 카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에는 대학 등 교육기관에서 역술 강의가 개설되고 있다. 또 역술가 자격을 딸 수 있는 과정도 개설됐다. 한국역술인협회 부설 한국역학대학철학학원에서 역학 수강생을 모집한다. 한국역술인협회 관계자는 "예전에는 역술을 배우겠다는 분들의 연령대가 높았지만, 지금은 20~30대 청년도 적지 않다"며 "역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점에 빠진 대한민국,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하고, 초조한 심리가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이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게 되는데 이때 점술이나 비과학적인 것에 몰두하게 된다"고 짚었다. 곽 교수는 이어 "하는 일마다 예측할 수 있고, 잘 풀린다면 굳이 점집을 찾아갈 이유가 없다"면서 "능력에 따른 적절한 사회적 보상이 제때 이뤄지지 않는 사회에서 요행을 바라거나 운에 기대는 심리가 작용한다"고 덧붙였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