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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행 노동생산성' 선진국 엄습… 크루그먼의 저주 현실화

등록 2017-05-07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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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영환 기자 =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비꼰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의 저주가 미국, 유럽연합을 비롯한 선진국을 엄습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이 쌓아올린 경제 기적은 노동, 자본을 쏟아부어 만든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독설이 모국인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뜻이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와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일본·유럽연합(EU) 등 경제강국들이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둔화되는 생산성을 회복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국채를 사들여 돈을 푸는 양적완화 정책으로 경제 전체에 봄기운이 퍼지고 있지만, 공급 능력은 개선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성 증가율은 기업의 부를 늘리고, 근로자 생활수준을 끌어올리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역진 현상은 우려할만하다. 생산성은 근로자들이 시간 당 만들어내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비롯한 산출물의 양이다. 근로자들이 매 시간 얼마나 많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냈는 지를 재는 대표적인 효율성 측정의 척도다.

 FT가 인용한 민간 경제조사기관 컨퍼런스보드(Conference Board) 조사결과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6년까지 스페인,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주요국들의 노동생산성 성장률은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연 1% 에도 못 미쳤다. 작년에 제품·서비스 100개를 생산했다면 올해는 101개도 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노동 생산성이 떨어지면 같은 양의 서비스나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하거나 효율이 높은 장비를 들여놓아야 한다. 경제 예측기관인 MFR의 경제학자인 조슈아 샤피로는 “근로자들의 상품이나 서비스 생산물이 완만한 속도로 증가하고, 근로시간은 더 빠르게 느는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컨퍼런스보드 자료에 따르면 미국과 캐나다의 노동생산성이 지난 10년간 연평균 0.8% 상승했고, 일본은 0.6%, 프랑스와 독일은 0.5%에 그쳤다. 가장 눈길을 끄는 국가는 영국이다. 지난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한 이 섬나라의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같은 기간 0.1%로 이탈리아와 같은 수준이었다.

 영국의 EU탈퇴는 특히 노동력 유입을 떨어뜨리고 나이 든 근로자들에 대한 의존을 더 심화시키는 반면, 무역 의존도를 낮춰 경쟁의 강도를 약화시킴으로써 이러한 추세에 기름을 부을 가능성이 있다고 FT는 경고했다. 반면 유럽 남부에 위치한 피그스(PIGGS)국가인 스페인의 노동 생산성이 연간 1.3% 로 눈길을 끌었다.

 주요국의 노동 생산성이 지난 10년간 뒷걸음질한 배경으로는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영향이 가장 큰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문을 닫으며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업들이 허리띠 졸라매기에 나서며 생산성 향상을 뒷받침할 적절한 인적·설비 투자가 이뤄지기가 어려웠다는 뜻이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재무재표가 상대적으로 부실한 기업, 그리고 중소기업에서 더 뚜렷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불똥이 사방으로 튀자 재무 사정이 안 좋은 기업들이 허리띠를 졸라 매고 부채를 상환하는 데 주력했다. 이에 따라 최신 장비, 설비, 교육 등에 투자하지 못하자 근로자들의 생산성도 덩달아 떨어졌다는 뜻이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지난달 17일 발표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글로벌 생산성(Gone with the Headwinds: Global Productivities)’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이러한 진단을 내놓은 바 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빗대 지난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하면서 각국의 '노동 생산성'이 타격을 입은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보고서는 아울러 퇴조하는 ICT(정보통신기술) 붐도 이러한 생산성 하락의 또 다른 배경으로 꼽았다. 지난 1990년말부터 2000년 초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컴퓨터를 비롯한 ICT기술이 금융업, 제조업의 체질을 뒤바꿔 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붐이 사그라지고 새로운 혁신은 지체되면서 생산성이 둔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폴 애시워스(Paul Ashworth) 캐피털이코노믹스 이코노미스트는 이에 대해 “인터넷과 데스크톱 컴퓨터가 촉발한 생산성 증가 효과가 이미 2004년 이후 사라지기(fade) 시작했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일터에 인터넷이 급속히 보급되던 지난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평균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2.6%에 달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한국 제조업의 요소 생산성도 2004~2012년 연평균 1.0%에 그쳤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은 지난 2015년 3월 발표한 보고서(지정구 조사국 과장·정원석 조사역)에서 이같이 지적한 바 있다. 이는 1992~2003년 1.9%에 비해 반 토막이 난 것이다. 총요소생산성은 2000년 초반만 해도 견조한 흐름을 보였으나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뒷걸음질쳐 왔다.

 IMF는 글로벌 금융위기 외 ▲주요국들의 인구 노령화를 비롯한 인구학적인 변화 ▲교역의 둔화(global trade slowdown)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한 신흥국 구조개혁 노력의 지체 ▲인적자원 축적 속도의 둔화 ▲불확실성 지속에 따른 기업가 정신의 약화 등을 이러한 생산성 둔화의 또 다른 배경으로 제시했다.

 보고서는 또 이러한 흐름을 뒤집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의 양과 질을 끌어올려야 하며 ▲더 개방된 교역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민 정책을 개선해 인력을 받아들여야 하며 ▲인프라 투자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이러한 생산성 둔화는  정책당국자들의 고민을 깊게 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1월 20일 출범한 미국이 대표적이다. 골드만삭스 출신의 스티브 므누신 미 재무장관은 연간 3%에 달하는 GDP성장률 목표를 제시했다, 하지만 이러한 목표는 생산성 증가율이 회복되지 않고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FT는 전했다.

 일본 아베 신조 정부의 고민도 깊다.  임금을 높여 소비를 유도함으로써 디플레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계획이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임금을 올리려면 생산성이 더 높아져야 하지만, 현실은 역주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낙후된 서비스부문이 일본경제의 3분의 2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점이 부담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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