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개헌시계 빨라지나①]'아베 집중탐구'…'도련님'에서 노회한 정치가로
아베 총리가 소신 연설에서 인용한 발언의 주인공이 풍운아 ‘요시다 쇼인’이다. 그는 극우 정치인인 아베의 생각을 이해하는 열쇠로 통한다. 쇼인은 조슈(야마구치현)에 학당(쇼카손주쿠)을 차려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를 비롯한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배출한 주인공이다. 아베가 첫 소신 표명 연설에서 동향(야마구치현)의 쇼인을 거론한 배경은 두 가지다. 쇼인이 일본의 앞날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려 메이지 유신의 길을 닦았듯이 자신도 헌법을 다시 써 일본 부활의 기틀을 세우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개헌이 일본을 근대화의 길로 이끈 메이지 유신에 필적하는 구국의 결단이라는 아베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개헌을 이뤄내기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쇼인은 29세의 나이에 에도(지금의 도쿄)의 덴마초 감옥에서 참수되며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하지만 그가 양성한 제자 92명은 이른바 삿초(사쓰마-조슈(야마구치현)) 동맹을 통해 무신정권인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근대 국가의 여명을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아베의 이날 소신표명은 개헌을 향한 신념의 뿌리가 매우 깊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가 정치적 부침에 따라 말을 바꿀 수는 있어도, 앞으로도 이 목표 자체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가 주창해온 개헌론은 극우 아베가 견지해온 소명의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지난 10년간 정치인으로도 한층 노련해졌다는 평가다. 1990년대 초반 정치 입문 후 자민당 간사장, 내각 관방장관 등 당정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13년 만에 90대 총리의 자리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지난 2007년 절정의 순간에 무너지며 한동안 야인 생활을 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아베는 2007년 7월29일 참의원 선거에서 대패(121석중 37석 획득)하며 야당인 민주당에 1당을 넘겨준 뒤 총리 직을 내놓는다. 소신표명 뒤 불과 이틀만에 총리직을 던져 '자민당을 망쳤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아베는 이때만 해도 일본 최고의 정치 명문가 출신이라는 후광에 갇혀 위기대응능력에 현저한 한계를 보였다.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혼마 마사아키 정부세제조사회 회장, 규마 후미오 방위상을 비롯한 측근들의 비리와 설화 등이 꼬리를 물었지만 적절한 대응시기를 놓쳐 화를 키웠다. 관저정치에 함몰돼 민심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전임 총리인 고이즈미의 신자유주의 개혁에 피로한 일본 국민들은 아베에게 먹고 살 길을 물었으나, 그는 개헌을 비롯한 정치 의제에 집착했다. 일본 최고의 정치 명문가라는 화려한 이력이 오히려 ‘독’이 됐다는 분석이다. 그는 가계부터 남달랐다. ‘쇼와의 요괴’로 통하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그의 외할아버지이고, 원조 보수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외무상을 지낸 아베 신타로를 아버지로 뒀다. 친할아버지인 아베 간도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부인인 아키에 여사도 대형 제과회사인 ‘모리나가’ 집안 출신이다. 일본인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던 아베가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2009년 8월 중의원 선거를 전후한 시기였다. 그는 지역구인 야마구치4구(시모노세키시.나가토시)에 출사표를 던졌다. 총리까지 지낸 아베가 재출마하자 손가락질을 하는 지역구민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아베 총리가 이때 지역구를 돌며 뿌린 명함만 수만여 장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아베는 힘든 시기를 거치며 노련하고 현실 감각을 갖춘 정치인으로 변모해갔다. 그는 ‘반성 노트’를 작성하며 1차 내각에서 저지른 실기를 복기했고, 중의원 당선 이후 여야 의원 211명과 당을 초월한 모임(증세에 의존하지 않는 부흥재원을 요구하는 모임)을 꾸렸다. 이 자리에서 담금질한 일본경제 부활 프로젝트가 바로 ‘양적완화’다. 민생 문제를 풀지 않으면 개헌을 비롯한 정치 의제는 결코 힘을 받을 수 없다는 깨달음의 산물이었다. 그는 이 모임의 회장을 맡아 3개의 화살로 불리는 정책으로 구성된 아베노믹스의 핵심 아이디어를 수혈받는다. 이 때가 일본에서 동일본 대지진이 터진지 석 달이 지난 2011년 6월이다.ㅣ 이번 중의원 선거는 10년 전 데자뷔를 떠오르게 한다. 친구에게 특혜를 준 가케 학원 사태는 정권을 위협하는 대형악재였다. 하지만 아베의 대응은 10년 전과 확연히 엇갈렸다는 평가다. 그는 지난 8월 3일 개각을 단행하는 등 발 빠르게 대처한 데 이어 당내 비주류들에게도 일부 자리를 배분했다. 개각의 효과를 놓고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지지율 추락세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내각 구성원들의 실수를 감싸다가 화를 자초한 지난 1차 내각 때와는달리, 대응이 신속하다는 뜻이다. 물론 운도 무시할 수 없다. 지지율이 뚝 떨어졌지만, 민진당을 비롯한 야권이 분열돼 표가 나뉜 것이 천우신조였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일본인들의 느끼는 안보 위기도 최고조에 달했다. 극우 정치인인 그에게 유리한 선거 구도가 펼쳐진 것이다. 그는 선거 유세기간 내내 가는 곳 마다 북풍 몰이를 거듭했다. 지난 2007년 총재에서 물러난 뒤 다시 화려한 복귀를 한 데는 민주당 정부의 무능을 드러낸 2010년 센카쿠 열도 사태 또한 한몫을 했다. 가자마 나오키 전 일본 외무성 차관은 “아베는 일본과 미국을 대등한 관계로 만들고 싶어한다. (이러한 생각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내가 아니라 국민이 판단할 문제”라고 평가했다. 아베가 결국 개헌을 추진할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본 전문가인 윤성준 다인투플러스 고문도 “(아베는) 이번 선거기간 중 도정은 몰라도 국정은 역시 야당에 맡길 수 없다고 되풀이해 강조했다. 나머지는 믿을 수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울러 “(아베가) 부지런하고 상대적으로 오픈돼 있다”고 덧붙였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