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관계, 봄날은 오나➁]마늘파동에서 사드까지, 되돌아본 한중 분쟁史
그 발단은 1999년 9월30일 한국의 농협중앙회가 신청한 무역구제조치였다. 중국산 마늘 수입이 늘며 농가 피해가 커지자 산업자원부 무역위원회는 ‘고율의 관세 부과를 골자로 한 잠정적 수입제한(temporary safeguard)’을 건의했고,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가 이 건의를 수용해 2000년 6월4일까지 200일간 중국산 마늘에 대해 긴급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한다. 중국 장쩌민(江澤民) 정부의 대응도 매서웠다. 김대중 정부가 세이프 가드 조치 만료를 불과 사흘 앞두고 정식수입제한을 발동하기로 결정하자 강력한 맞대응 카드를 뽑아들었다. 한국산 휴대폰, 폴리에틸렌을 겨냥한 수입전면금지 선언이 그것이다. 중국의 수입금지 선언의 후폭풍은 거셌다. 보복 관세 부과를 거치지 않고 바로 금수조치를 시행한데다, 보복 대상 또한 대중 수출 주력상품인 휴대폰과 폴리에틸렌이었기 때문이다. 두 상품의 교역액은 중국산 마늘수입액에 비해 무려 50배 이상 많았다. 중국 측의 이러한 과잉 대응을 놓고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았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중국산 마늘을 둘러싼 갈등의 불똥이 주력수출품목으로 튀자 김대중 정부는 사실상 백기를 든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공을 들여온 중국이 신중한 대응을 할 것이라는 주무 부처의 예상은 오판에 불과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한국 업체들이었다. 석유화학공업협회, 한국전자산업진흥원 등이 긴급관세 부과를 재고해 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양국은 이에 따라 2000년 7월 협상에 돌입했고, 불과 2주 만에 협상을 타결 짓는다. 우리 측은 중국산 마늘에 대해 세이프가드를 유지했지만, 저율의 관세를 적용하는 물량이 큰 폭으로 늘면서 이 조치의 실효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마늘 파동은 한국 정부의 완패로 마무리된다. 김성훈 당시 농림부 장관은 기자와 인터뷰에서 "농림부 장관 시절은 정말 혹독했다. 힘들어서 더 이상 장관직을 감당할 수도 없어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를 안 받아줄까 봐 치과 증명서까지 첨부다"고 당시의 고충을 토로한 바 있다. ‘한국 정부가 죽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힘겨운 상대 중국과 다시 부딪친 것은 불과 2년 뒤였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부’라는 주장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킨 측은 이번에는 중국이었다. 중국 국무원 산하의 사회과학원이 총대를 멨다. 이 싱크탱크는 산하의 중국변강사지연구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이같이 주장하고 나섰다.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대외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노무현 정부의 위기대응능력을 시험하는 진검승부의 장이었다. 중국은 역사왜곡의 수위를 높여갔다. 고구려에 이어 고조선, 발해를 잇달아 자국사에 포함했고, 이러한 폭주는 한국민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지난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어 숨진 효순이·미순이 사태로 고조된 반미 정서를 등에 업고 집권에 성공한 노무현 정부의 위기감도 컸다. 노무현 정부는 중국측의 도발에 신속히 대응했지만 그 한계도 뚜렷했다. 당시 고구려사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차관 급으로 끌어올리고, 외교부내 주무부서도 중국을 담당하는 동북아2과로 바꿨다. 하지만 후진타오 정부는 2004년 8월5일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사에 이어 한국사를 삭제하며 노무현 정부의 바람을 외면한다. 양국간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중국이 동북공정 카드를 꺼내든 배경으로는 2가지가 꼽혔다. 우선, 일부 시민사회단체 등을 중심으로 고토 회복의 열기가 꿈틀거리던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적 관련성을 부인하기 위한 꼼수로 풀이됐다. 아울러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해 몽골이나 베트남 등이 원나라나 남월의 역사를 자국사로 주장하는 상황에 대응하고, 조선족들의 동요 또한 억지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로도 풀이됐다.
한국의 고대사 해석을 놓고 평행선을 달리던 양국이 출구 찾기에 나선 것은 동북공정이 대외적으로 공표된 지 2년여가 지난 2004년 8월23일이었다. 꾸밈없는 성격으로 널리 알려진 말갈족 출신의 우다웨이(武大偉) 당시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이날 한국 측과 5개항의 구두양해 사항에 합의한다. 5개항은 ▲(한중) 양측이 향후 역사문제로 인해 한중간 우호협력관계가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1992년 한중 공동성명 및 1993년 7월 양국정상 간 공동성명에 따라 전면적인 협력동반자 관계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양측은 학술교류의 조속한 개최를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 등을 포함하고 있다. 양국간 구두합의는 ▲역사논쟁이 더 큰 갈등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 ▲분쟁 해결 방식의 큰 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역사·영토문제는 민족주의 정서가 강하게 투사되는 분야로 본질적으로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 한계도 뚜렷했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이 중국의 변강사지연구센터와 제주도와 베이징을 오가며 학술회의를 여는 등 고구려사 문제를 협의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한중 양국은 동북공정이 불거진 지 3년 뒤인 지난 2005년 다시 김치파동을 겪는다. 수교 이후 한동안 찾아볼 수 없던 통상 분쟁이 점차 잦아진 데는 중국의 국력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빠른 속도로 커지고, 중국이 점차 제목소리를 내면서 그 불똥이 양국간 교역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과 달라진 점도 한몫했다.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2010년 이후, 한중 양국 갈등의 백미는 역시 작년 2월 한미 양국이 배치 문제를 놓고 공식협의를 결정한 이후 1년8개월간 지속된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문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2015년 9월 중국의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며 절정에 달한 양국관계가 싸늘하게 식는 데는 불과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