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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中 균형외교, 성공의 방정식은③] 다시 주목받는 ‘동북아균형자론’

등록 2017-11-12 08:30:00   최종수정 2017-11-14 08:5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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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노무현재단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4주기를 앞두고 재임기간 휴가 등 비공개 일정중에 찍은 미공개 사진 10장을 29일 공개했다. 사진은 2007년 1월 14일 ASEAN+3 정상회의 참석차 필리핀을 방문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이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숙소인 샹그릴라 호텔에서 보고서를 읽고 있는 모습. (사진=노무현재단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박영환 기자 = “우리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을 해나갈 것입니다. 따질 것은 따지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 주권국가로서 당연한 권한과 책임을 다해 나가고자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동북아세력 판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동북아 균형자론’이 윤곽을 드러낸 시기는 참여정부 당시인 지난 2005년 3월을 전후해서다. 노무현 대통령은 3월22일 육군 3사관학교 졸업식 치사를 통해 새로운 대외 정책의 대강을 설명하며 이 용어를 사용한다. 같은 달 8일 공군사관학교 연설에서 이 정책을 첫 언급한지 불과 10여일 만이었다.

‘균형자’라는 용어의 의미가 더 분명해진 것은 한 달이 더 지나서였다. 노 대통령은 같은 해 4월 국방부 업무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힘이 있느냐? 있습니다. 미국에 권고하고 러시아에 제안할 수 있으면 있는 것입니다. 세계 10위의 경제력, 군사력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라고 강조한다.

노 대통령이 특유의 화법을 동원해 풀어낸 이날 발언은 베일에 가린 ‘동북아 균형자론’이 대중들에게도 그 실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한반도의 명운을 좌우할 주요 결정 사항을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을 비롯한 열강에게 만 맡겨두지 않겠다는 자주의식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동북아 균형자론의 맹아는 이미 2002년부터 싹이 트고 있었다.

노 대통령이 대선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둔 2002년 이후 동북아에서는 역내 질서를 뒤흔드는 메가톤급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는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한다. 아울러 북한에서는 같은 해 말 농축 우라늄을 둘러싼 북미간 갈등으로 2차 핵 위기가 점화됐고, 중국은 고대사인 고구려사를 자국 고대사의 일부에 편입하는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세기사적 사건들은 노 대통령이 한반도 갈등의 뿌리를 고민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지난 2009년 출간된 회고록(성공과 좌절)에서 이러한 생각의 일단을 토로한다. 그는 “동북아 지역에서의 역사적인 대결 구도가 한반도 분단의 원인으로 작용했고, 지금도 그 대결적 질서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부터 시작된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대결 등) 이 대결적 질서를 풀어가지 않으면 남북 분단도 쉽게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북간 협력이나 통합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동북아시아 질서 전체를 놓고 전략을 짜나가야 합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노 대통령이 육군 3사관학교 졸업식 치사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동북아세력 판도는 달라질 것”이라고 한 발언에서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통령 아젠다’였다.  노 대통령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4강으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현실을 고민한 끝에 내놓은 대외 정책이었다는 뜻이다. 양차 세계대전을 ‘반면교사’로 삼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발족한 유럽과 달리, 집단안보기구가 없다보니 과거사, 영토 문제로 촉발된 역내 갈등을 풀지 못하는 동아시아의 한계를 절감한 데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평화의 항구적인 정착을 뒷받침할 다자안보공동체를 구축하겠다는 것이 참여정부가 제시해온 궁극적인 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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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AP/뉴시스】런던의 유럽의회 영국 사무소 건물에 14일(현지시간) 영국 국기와 유럽연합(EU) 기가 나란히 나부끼고 있다. 2017.3.20.
유럽은 이 과정에서 늘 중요한 아이디어의 '수원지'역할을 한다. 그는 앞서 지난 2004년 12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과 소르본 대학교 연설에서 동북아 균형자론의 구상을 가다듬은 것으로 전해진다. 두 차례 세계대전의 전화를 딛고 유럽연합(EU)을 발족한 유럽을 귀감으로 삼은 것이다. 노 대통령은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에 대해서도 높은 관심을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구상한 이러한 ‘동북아 균형자론’의 생명력은 길지 못했다. 평화와 공존의 질서가 동북아에 뿌리를 내리는 데 앞장서겠다는 그의 원대한 구상은 여론의 역풍을 맞으며 곧 소멸한다. 비판론자들은 참여정부가 스스로의 역량을 과대평가해 환상에 빠져 있다고 각을 세웠다.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 중국과 한국 등 동북아 주요국 사이에 난마처럼 얽혀 있는 역사·영토 갈등을 한국이 주도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독선이라는 것이다.

미국도 참여정부의 이러한 구상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섰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자장이 강한 한국에 대해 의혹의 시선을 떨치지 못해왔다. 물론 독자 외교 노선이 뭇매를 맞은 데는 노 대통령을 향한 보수의 뿌리 깊은 불신도 한몫했다. 동맹인 미국과는 거리를 두고, 결국 중국에 다가서겠다는 동맹 파기 선언이 아니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효순이·미순이의 미군 장갑차 사망 사건으로 타오른 촛불 민심을 등에 업고 집권한 노 대통령은 늘 이러한 의혹에 시달렸다.

노 대통령이 내건 동북아 균형자론은 공론화된 직후 사실상 사장되는 운명을 맞았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지난 5월 출범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지난 2009년 계간인 ‘광장’에서 동북아균형자론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스러진 데 대해 안타까움을 피력한 바 있다. 그는 “보수 언론은 한국이 남방 3각에서 북방 3각으로 전환한다는 식으로 균형자 개념을 다르게 만들어 버렸다. 동북아 균형자론처럼 대통령의 뜻이 왜곡된 것도 없을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동북아균형자론이 그 가치와 무관하게 평가절하됐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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