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10년 어제와 오늘]⑥기성 정치의 붕괴…양극화 심화
단순히 미국 금융시스템 붕괴로만 치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민주주의의 정치 철학과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이 함께 무너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정치는 지난 10년간 극우주의와 포퓰리즘에 발목이 잡혀 출구가 보이지 않고 있다. 정부 개입으로 다행히 금융위기는 극복했지만, 한동안 고삐를 바짝 당겼던 월스트리트(월가)에 대한 규제는 다시 그 빗장을 풀고 있다. 금융위기 당시 너도 나도 필요하다고 외쳐댔던 대안 자본주의 논의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정치적 양극화는 여전히 심각한 데다, 정치를 작동시키는 것은 오직 이데올로기 밖에 없다. 경제적 양극화 역시 전혀 치유되지 못했다. 금융위기 이전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정부 개입이 늘기는 했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나 진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 극우 포퓰리즘, 주류로 자리매김…길 잃은 기성정치 리먼 사태 이후 당선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금융위기 후폭풍을 감당하느라 취임 초기부터 정신이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그야말로 초긴장 상태였다. 노숙자가 속출하고, 깡통주택이 쏟아졌고, 실업률이 급증했으며, 경제난으로 인해 자살자도 끊이지 않았다. 가장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들의 분노는 두 곳으로 향했다. 정치인들과 시장 근본주의자들. 지난 수십년간 그들이 만들어낸 정치-경제 이데올로기와 그들만의 밀월관계가 최악의 상황을 초래했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도 지난 2009년 8월 미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거의 40년 동안 자유시장이 유난히 잘 작동해왔다"며 "그 문제들이 얼마나 중대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자유시장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사실에 매우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기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공화당과 조지 W 부시 행정부,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 등은 그야말로 완벽한 시장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리고 효율적인 정부와 시장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정부를 '악마'라고 생각했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메카인 미국의 이런 태도는 유럽, 아시아 등 전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만큼 리먼 사태의 충격은 컸다. 사람들은 주류 정치권과 시장근본주의자들을 향한 분노를 '투표'와 '시위'라는 두가지 형태로 표출시켰다. 우선 기성 정치권에 대한 반발로 자신의 한 표를 극우 포퓰리즘 정당에 내어주었다. 특히 2010년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들의 득세는 급속도로 진행됐다. 실업 공포, 사회보장 축소 등 경제 위기 의식을 자극해 제도권에 진입한 뒤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극우정당도 나왔다. 당시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극우 정당들이 유럽가치를 내세워 공포와 증오를 자극함으로써 과거에는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발언들로 유권자들을 유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탈리아, 스위스에서는 극우정당이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성과를 올렸다. 네덜란드, 벨기에에서는 극우정당이 약진했고, 스웨덴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극우정당인 민주당이 의회 진출에 성공했다. 이런 상황은 결국 2016년 미국에서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의 등장은 사실상 기성 정치 몰락의 정점이었다. 2017년에도 프랑스에서 극우정당 국민전선이 원내 진입에 성공하는 등 지구촌에서 극우정당은 여전히 확대일로다.
극우정당의 제도권 진입은 강력한 반(反) 이슬람, 인종차별주의 정책 도입으로 이어졌다. 부르카(온 몸을 가리는 이슬람 여성 겉옷) 논쟁에서부터 난민과 이민 문제 등에서 극우정당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다. 트럼프도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한 게 이슬람권 출신들의 미 입국을 막는 반이민행정명령에 서명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지난해 12월17일 체코 프라하에 모인 프랑스, 영국, 폴란드,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극우정당 회의에서는 유럽연합(EU) 없는 새로운 유럽이 논의됐다. 여론의 분노는 대규모 시위로 표출되기도 했다. 2010년말 튀니지에서 시작돼 중동 및 북아프리카 국가들로 확산된 반정부 시위 '아랍의 봄'에 자극 받아 유럽에서는 그해부터 연일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그러다 2011년 9월17일 지구 반바퀴를 돌아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 '월가를 점령(Occupy)하라'는 시위가 시작됐다. 금융위기 이후 심화되고 확대된 경제적 불평등의 심각성을 반영하듯이 시위대가 내세운 구호는 "우리는 99%(We are 99%)"라는 것이었다. 이 시위는 미국에서 급속도로 확산됐다. 같은해 10월6일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시위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고, 벤 버냉키 연준 의장도 시위대 요구에 공감을 표했다. 정치적 양극화 심화로 민주당과 공화당이 좀처럼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상황에서 월가 시위는 미국인들의 유일한 분출구였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활력을 잃는 대신 시위를 매개로 한 직접 민주주의로 전환이 이뤄지고 있었다. 약 한달 후인 10월15일 급기야 시위는 전 세계로 확산됐다. '행동의 날'로 정해진 이날 약 82개국 900여개 도시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벌어졌다. 월가 점령 시위가 절정에 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날을 기점으로 월가 시위는 사그라들어 73일만에 막을 내렸다. 명분은 있었지만 폭력사태가 불거진 게 문제였다. 2012년 5월1일(노동절) 미 전역에서 대규모 춘투(春鬪)가 계획되면서 월가 점령 시위가 다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주목됐지만 꺼진 불씨를 다시 살리기는 쉽지 않았다. 투표를 통한 유권자 반발이 지난 10년간 점점 더 거세진 것도 이 때문이다. 외곽에서 아무리 외쳐본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인식은 제도권 진입을 열망하던 극우 포퓰리스트들과 분노한 여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트럼프와 같은 '아웃사이더'는 이 같은 여론의 정서를 정확하게 읽어냈다. 그는 2016년 미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원색적 막말과 인종차별적 발언들을 마구 쏟아냈고, 그 전략은 명중했다.
◇ 자본주의, 이대로 괜찮은가 문제는 트럼프 같은 포퓰리스트들이 정치적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데 있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되면 소득 불평등이 가중되면서 경제적 양극화도 심화될 수 밖에 없다. 이와 관련,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도 자신의 저서 '대폭로'에서 이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어쩌다 미국이 이 지경이 되었나? 1990년대에 그토록 이성적인 경제지도력을 발휘했던 미국의 정치 체계가 어쩌다 지금과 같은 부정직과 무책임의 난국으로 들어갔나? 내가 보기에 그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은 미국 정치가 대단히 양극화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중간이 힘을 쓰지 못했다. 그 정치적 양극화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갈수록 심화되는 소득 불평등이다. 그 결과는(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호되게 때리려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특혜를 확대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계급 전쟁이라는 형태이다." 크루그먼은 또 다른 저서 '진보주의자의 양심'에서도 같은 문제를 거론했다.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소득 격차를 확대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 정치적, 경제적 변화의 시기를 살펴보면 경제가 아닌 정치가 변화를 주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불평등이 확대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983년이나 1984년까지도 과연 당시 통계가 이전의 추세로부터 어느 정도로 이탈할 조짐을 보이는지를 둘러싸고 학문적인 논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우파가 공화당을 차지했고, 이를 가능케 한 보수주의 운동도 1970년대 초반부터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따라서 시기적으로 정치적 양극화가 먼저 이루어졌고, 경제적 불평등이 그 뒤를 따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크루그먼의 지적을 지금 상황에 빗대 보면 극우 포퓰리스트인 트럼프 하에서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간극은 이전보다 더 커진다는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부자감세를 위한 세제개편을 단행하고, 기업들을 위해 각종 규제를 해제하고 있다. 여기서 과연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금융위기 때보다 건강해졌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리먼 사태가 벌어지고 1~2년 뒤 전 세계적으로 대안 자본주의 논의가 한창 진행될 당시에도 이 문제가 심각하게 지적됐었다. 200년 이상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자본주의 대안은 자본주의이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가 변화하거나 발전하지 않을 경우 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이 그랬고, 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칼레츠키는 자유방임시장을 지지하는 고전자본주의, 정부 주도의 케인즈식 수정자본주의, 정부를 '악마'라고 생각하는 극단적 신자유주의를 거쳐 앞으로 또 다른 자본주의를 접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도, 시장도 완벽하지 않다는 게 금융위기를 통해 확인된 만큼 자본주의의 다음 버전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칼레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융위기 이후에 서구의 사회·정치 모델이 전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필요한 개혁이 추진되려면 미국 주도의 민주적 자본주의가 전세계 국가와 민족들에게 가장 성공적이고 매력적인 정치·사회 모델로 다시 떠올라야 한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서구 세계가 2007~2009년 금융위기를 벗어나 완전고용과 견실한 경제성장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서구의 민주주의가 중국의 권위주의적 국가 주도 자본주의의 도전을 극복하려면 미국과 영국, 다른 선진국의 경제성장과 생활수준이 앞으로 오랫동안 악화될 것이라는 예측이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한다. (...) 그러나 만약 세계 경제가 회복되지 않고 자본주의가 진화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경우에 부와 권력은 미국과 유럽에서 아시아로 빠르게 옮겨갈 것이다." 칼레츠키의 주장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금융위기 당시 뜨거웠던 대안 자본주의 논의는 언제부턴가 온데 간데 없다. 오히려 금융위기가 극복되고, 글로벌 경제가 어느 정도 호황을 누리면서 극단적 시장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이들은 리먼 사태 때도 정부의 개입 때문에 민간기업 활동이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금융기관들이 파산하도록 정부가 내버려뒀으면 금융위기가 더 잘 해결됐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트럼프가 월가에 대한 규제의 빗장을 풀고, 부감감세를 강행하는 데도 이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미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결국 트럼프와 그 이너서클이 이같은 시장근본주의자들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할 경우 미국과 세계경제가 또 다시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경고는 정말로 기우가 아닐 수 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