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10년 어제와 오늘]③유로존, 수렁에서 벗어나다
【서울=뉴시스】오애리 기자 = 지난 해 12월 19일, 그리스 국회 연단에 한 남자가 섰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다. 이날 국회 회의장에는 2018 회계연도의 긴축 예산안 표결을 앞두고 야당의 강한 반대로 인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긴축 예산안이 통과하지 못하면 3차 구제금융의 지급이 중단될 수 있다. 하지만 치프라스총리의 얼굴에는 늘 그랬듯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긴축예산의 상정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못 박았다. 지난 2010년부터 심각한 재정위기로 인한 디폴트(채무불이행)를 막기 위해 유럽연합(EU),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에 의존해왔던 그리스가 2018년 여름 쯤엔 드디어 홀로서기를 할 수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차구제금융을 받은 2010년 -5.4%, 2011년 -8.9%, 2012년 -6.6%, 2013년 -3.9%를 기록하더니 2014년엔 마이너스 권을 극복하고 0.8%를 기록했다. 그리스 정부는 올해 성장률을 1.6%, 내년에는 2.5%로 내다보고 있다. 비록 GDP 대비 부채비율이 여전히 179%(2016년 기준)이고, 실업률도 20% 대이지만, 유로존은 물론 유럽 전체, 그리고 세계 경제를 흔들었던 '진앙지' 그리스가 최악의 국면을 넘기고 있는 것이다. ◇2010년 유로존 악몽의 해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담보대출) 사태와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인한 미국 뉴욕발 금융위기의 불길이 유럽으로 본격적으로 옮겨 붙은 것은 2010년이었다. 방만한 재정과 고질적인 부패에 시달려온 그리스가 결국 파산위기에 처하면서 유로존은 물론 유럽연합의 존립기반 자체를 뿌리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재정상태가 심상치않다는 경고등이 들어온 것은 2009년 말이었다. 같은 해 10월 경제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우파 보수정권을 교체한 사회당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당시 총리는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이 6%라던 전 정권의 발표를 뒤엎고 12.7%라고 인정해 그리스 국민은 물론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유로존 회원국들이 지켜야 하는 재정적자 기준은 3%인데, 그 보다 무려 4배나 높은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EU 통계기관인 유로스타트는 그리스 재정적자율을 파판드레우 정부 주장보다 더 높은 13.6%로 상향조정했다. 그러자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그리스 신용등급을 정크본드 수준으로 추락시켰고, 그리스의 파산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공포가 급증했다. 결국 2010년 5월 2일 EU· ECB· IMF는 1110억 유로 규모의 그리스 구제금융에 전격 합의했다. 이로써 그리스는 사실상 재정적, 경제적 독립권을 잃어버렸고 살인적인 긴축의 고통의 시대를 맞게 됐다. 그리스 구제금융으로 한 풀 꺽이는 듯했던 유로존 위기는 8월 아일랜드 사태로 되살아났다. 세계금융허브를 자처해온 아일랜드가 뉴욕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결국 아일랜드는 2010년 11월 85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이듬해인 2011년 5월에는 포르투갈이 780억 유로 규모 구제금융을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다시 그리스였다. 1차구제금융과 혹독한 긴축재정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경기가 급추락한 탓에 그리스 경제가 회복 기미를 보이기는 커녕 더 깊은 위기의 수렁에 빠져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2012년 3월 1300억 유로 규모의 2차 구제금융, 2015년 8월 860억 유로 규모 3차 구제금융을 받아야만 했다. 3차 구제금융의 기한은 오는 8월 20일이다. 그리스발 유로존 위기는 아일랜드와 포르투갈을 거쳐 스페인을 강타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경제의 기반까지도 뒤흔들었다. 스페인은 2012년 6월 EU로부터 1000억 유로 규모 구제금융을 받았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구제금융 사태는 피했지만 수년간 마이너스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에 시달려야만했다. 유로존 및 유럽 경제가 침체의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자 ECB는 대규모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되살아나는 유럽 경제 유로존과 유럽의 경제는 2016년 하반기부터 서서히 수렁에서 빠져 나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로스타트는 유로존의 2017년 2분기 GDP 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0.6%, 연율로는 2.1% 성장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는 2011년 3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치였다. 고용도 되살아나고 있다. 지난 해 12월 13일, 유로스타트는 2017년 2분기 유로존과 EU고용이 전 분기 대비 각각 0.4%와 0.5% 늘었다고 밝혔다. 3분기 고용은 각각 0.4%와 0.5%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경제위기가 극심했던 2013년 유로존 평균 실업률이 12%, 청년실업률은 그리스 경우 40%를 나타냈던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이다. 지난 해 말 파이낸셜타임스가 이코노미스트 3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올해 유로존의 경제성장률이 평균 2.3%로 전망됐다. 앞서 유럽중앙은행(ECB)이 유로존의 2017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4%, 2018년 성장률을 2.3%로 내다본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유로존과 유럽 경제의 안정적인 회복을 방해하는 최대 장애물은 바로 '정치'이다. 미국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부터 10년, 그리스 1차 구제금융 사태로부터 8년이 지난 현재 유럽 곳곳에서 극우주의, 포퓰리즘, 반EU, 반이슬람, 반이민 등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등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은 유럽 각국에서 치러졌던 선거는 한동안 거의 예외없이 무조건 ‘갈아치우고 보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권자들은 경제난에 대한 불만과 고통분담만을 강요하는 정부·집권당에 대한 환멸로 선거 때마다 정권교체를 반복했다. '분노하라'시위가 한때 전 유럽에 들불처럼 번졌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좌에도, 우에도 실망한 유권자들의 표심이 반EU를 주장하는 극우와 극좌 정당 쪽으로 향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다. 브렉시트(영국의 EU탈퇴)의 뿌리도 결국은 유럽의 경제위기이다. EU가 그리스발 유럽 경제위기의 재발을 막기위해 회원국들의 재정 및 금융정책에 대해 간섭을 강화하고 각종 규제를 도입하면서 영국 국민들의 반EU 정서가 고조됐고, 경제난으로 인해 일자리가 부족해진 상황에서 폴란드 등 동유럽 EU 회원국 노동자들의 유입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결국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로 브렉시트가 결정된 것이다. 난항을 거듭하던 영국과 EU 간의 브렉시트 협상은 지난 해 12월 1단계를 겨우 마무리하고 올해 본격적인 2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협상은 2019년 3월29일까지 모두 마무리돼야 한다. 협상이 끝까지 잘 마무리돼 영국과 EU가 '우호적인 이별'을 할지, 아니면 협상에 실패해 이른바 '하드 브렉시트'를 맞게 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어느 쪽으로 결론나느냐에 따라 영국과 EU는 물론 세계 경제가 다시 한번 요동칠 수있다. 브렉시트 협상 이외에 독일 연정협상, 오는 3월로 예정된 이탈리아 조기 총선 등도 경제회복을 위해 갈 길이 바쁜 유럽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정치 변수로 꼽히고 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