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안 나" 가해자들의 사과 방식…'미투' 두번 울린다
"답답해"…피해자 위로 대신 본인 억울 호소 "은폐로 책임 회피…전형적인 가해자 모습" "주변 사람 방관 대신 증언, 추가 폭로 필요" 【서울=뉴시스】박준호 기자 =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MeToo·나도 당했다)' 폭로에 몇몇 가해자들은 모르쇠로 일관해 죄의식마저 없는 게 아니냐는 의문과 비판이 일고 있다. '미투' 성추문에 연루된 일부 가해자들은 사과를 하면서도 "기억이 안 난다"는 변명을 보태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한 공통적인 패턴을 보인다. 이러한 이중적인 주장과 변명은 진정성 있는 사과를 원하는 피해자를 한 번 더 유린해 공분을 사고 있다. 영화배우 오달수씨는 "전부 제 탓이고 저의 책임"이라며 잘못을 인정하는 한편 "상처를 받으신 분들에 대한 기억이 솔직히 선명하지는 않다"고 아리송한 태도를 보였다. 오씨는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에게 "25년 전 잠시나마 연애감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성추문을 연애로 포장했다. 그는 성추행을 폭로한 연극배우 엄지영씨에겐 "깊이 반성하고 있다"면서도 "어떻게 말하든 변명이 되고 아무도 안 믿어 주시겠지만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다"고 피해자를 위로하는 대신 자신의 억울함을 더 호소했다.
김석만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약 20년 전의 성추행을 폭로한 피해자에게 "저의 잘못으로 인해 오랜 동안 느꼈을 고통과 피해에 대해 뼈아프게 사죄한다. 다만 폭로의 내용은 제가 기억하는 사건과 조금 거리가 있음을 알린다"며 부인했다. 연극연출가 이윤택씨는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 무릎을 꿇고 제 죄에 대해 그 어떤 벌도 받겠다"며 성추행을 시인한 반면 일부에서 제기한 성폭행 의혹은 단호하게 부인했다. 이씨는 성관계를 맺은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폭력적이거나 물리적인 제압은 없었다. 상호간의 믿고 존중하는…"이라고 말끝을 흐리며 책임을 회피했다. 탤런트 조민기씨의 대응 방식은 극과 극이었다. 청주대 연극영화과 옛 제자들의 잇따른 성추행 폭로에도 강력 부인하다가 갑자기 잘못을 시인하며 사과문을 발표했다. 경찰이 내사를 수사로 전환해 조씨를 피의자로 정식 입건한 당일이었다. 고은 시인의 성추문 논란은 피해자와 진실공방을 벌이며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는 영국 가디언에 낸 공식 성명에서 "나는 이미 내 행동이 초래했을지 모를 의도하지 않은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해 뉘우쳤다"면서도 "하지만 몇몇 개인이 제기한 상습적인 비행(habitual misconduct) 비난은 단호하게(flatly) 부인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이중적인 사과는 사건을 부정 혹은 축소·은폐하려는 가해자들의 전형적인 태도로 철저히 계산된 연출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박은주 한국여성단체연합 활동가는 "가해자가 성추문에 대해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안 난다는 취지로 변명하는 건 자신의 잘못을 은폐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려는 성범죄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며 "이런 태도의 사과는 공개적으로 발언하기까지 힘들게 용기를 낸 피해자들의 분노를 유발하고 2차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과거에도 '미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는 개개인의 '사적 영역'으로만 간주해 피해자 측 주장은 대부분 주목받지 못하고 묻히기 일쑤였다. 이럴수록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지지를 보내는 게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대부분 가해자들이 형식적인 사과는 잘 한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하면서도 나중에는 피해자가 힘들어 보여 도의적으로 미안하다고 한 것일 뿐 법적으로 처벌받을 만큼 잘못한 건 없다고 발뺌한다"며 "이런 가해자에 대해 피해자들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거의 없다. 주변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증언을 해주거나 다른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서 폭로하는 '미투 운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