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중국의 변방 소국으로 전락할 것인가"
미-중 대결 속 한국이 가야할 길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도전인가 기회인가중국의 심장부에 가까운 지리적 이점 극대화해야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김현호의 넛지인터뷰>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의 경력은 화려하고 다양하다. 서울상대를 나와 미 캘리포니아대학(UCLA)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40대 초반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아 4년간(1983~1987년) 재직했고, 이는 지금까지 경제수석 최장수 기록이다. 이어 56공화국 교체기에 재무부 장관을 연속 두 번(1987~1988) 지냈다. 1980년대 우리 경제의 도약기를 이끈 주역이라고 할만하다. 그는 1993년 세계경제연구원을 설립해 지금까지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경제특보,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G20정상회의준비위원장, 한국무역협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경륜을 과시했다. 1940년생인 그는 요즘 세계 석학들과 주요 국제기구 정책담당자, 그리고 주요 기업과 언론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그들이 보는 세계사적 변화를 우리정부 정책담당자들과 기업인들, 그리고 국민에게 알리는 세계경제연구원의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에도 마틴 펠드스타인 미 하버드대 교수,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 등을 차례로 초청해 강연과 간담회를 가졌다. 사공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최근의 미중 무역전쟁에서부터 시작됐으나 이야기는 자연스레 중국의 부상과 그것이 우리에게 미칠 영향, 그리고 우리의 대응 전략 등으로 이어져 나갔다. 우리와 세계의 미래는 이제 중국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에 그의 관심도 중국에 집중되고 있다고 했다. -미국과 중국이 정말 무역전쟁을 치를까. “한마디로 답한다면 그럴 확률은 상당히 낮다. 벌써 시진핑 주석이 보아오 포럼에서 트럼프에 화답했다. 시장개방도 더 하고, 지적소유권 보호도 강화하고, 구조조정도 강화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봐라 먹혀들지 않느냐'고 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물론 아니다. 시진핑이 이런 소리 한 게 처음도 아니다. 작년 다보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미중이 심각한 무역전쟁까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두 나라의 경제적 의존이 아주 깊다는 점이다. 거시적으로 볼 때 미국과 중국은 상호 가장 중요한 교역상대국이다. 미국의 제1 수입국이 중국이고, 중국의 제1 수출국이 미국이다. 또 중국은 미국의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이다. 무역전쟁을 하면 서로가 막대한 손해를 본다는 걸 양쪽 모두 잘 알고 있다. 트럼프가 비즈니스 출신에 협상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충돌까지는 가지 않을 것으로 처음부터 봤다.“ -전쟁까지는 아닐지라도 갈등은 고조되지 않겠는가.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가 약 4천억 달러 규모다. 그러다보니 미국은 주로 중국을 겨냥해서 관세를 부과하는 등의 자국 보호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방향은 옳지 않다. 무역적자라는 것은 사실 미국 스스로의 국내 저축과 투자의 차이에서 오는 거시경제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미국 사람들이 자기들이 버는 것보다 소비를 더 많이 하면서 결국 외국에서 돈을 빌려와야하고, 물건을 더 들여와야 하다 보니 생기는 문제다. 그런데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통해 혜택을 보는 소비 계층과 근로자들은 미국 전역에 확산돼 있고, 세계화와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산업은 특정 지역에 집중돼 있다. 오하이오, 펜실베니아, 위스콘신 주 등 소위 ‘러스트 벨트’(Rust Belt.제조업의 중심지였으나 불황을 맞은 미 북부와 중서부 지역)인데 여기가 트럼프 당선에 가장 기여를 한 곳들이라 트럼프가 정치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이 철강 알루미늄 같은 전통 산업 못지않게 신경쓰는 것이 지적재산권 아닌가. “그렇다. 철강, 알루미늄은 국내정치용 성격이 강하지만, 미국의 진짜 주 관심사는 첨단산업을 좌우할 기술을 보호하는 일이다. 미국은 중국이 AI(인공지능) 같은 4차 산업분야에서 이미 미국을 앞지르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우려를 갖고 있고, 여기에는 중국이 미국의 첨단 기술을 마구잡이로 낚아채 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중국이 자국에 진출하는 미국 기업들에 첨단 기술 이전을 강요한다든가, 아니면 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아예 인수해 버리든지, 또는 기술을 도용하는 행위가 만연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패권국가로서의 미국의 위상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보고 중국 관련 무역 규제에 안보 측면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번 무역 마찰도 패권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도전과 이에 대한 기존 패권국인 미국의 응전이 부닥치고 있는 것인가. “‘투기디데스 함정’이란 용어가 있다. 기존 패권국가와 신흥 강대국간에 발생하는 심각한 구조적 갈등을 뜻한다. 고대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패권전쟁을 기술한 그리스 역사학자 투키디데스에서 유래한 이 말이 요즘은 미국과 중국의 상황에 인용된다. 최근 미 하버드대 그레이엄 엘리슨 교수는 지난 500년간 기존 패권국가와 신흥 세력간 구조적 갈등 관계에서 비롯된 투키디데스 함정이 16차례 있었고 이중 12번이 전면전으로 비화했다고 분석했다. 전면전은 1,2차 세계대전이 대표적이고, 전쟁을 피한 사례는 미국과 영국, 미국과 소련의 대결 등이었다. 이번 17번째 함정인 미국과 중국의 대결도 점차 치열해지고 있지만 가까운 장래에 전쟁으로까지 치달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보나. “중국은 14억 인구에 현재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GDP기준으로 15% 정도다. 미국은 24%이다. (구매력 기준으로 하면 중국은 이미 몇 년 전에 미국을 앞선 것으로 추산된다). 늦어도 10년 이내에 중국은 경제규모 면에서 미국을 앞지를 것이다. 세계 속에서 중국 비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중국은 더욱 자신 있게 자기 갈 길을 가게 될 것이다. 현재 중국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란 게 무언가. 결국 아시아 아프리카 60여 개 나라를 중국에 의존적으로 만드는 일 아닌가. 도로 닦아주고, 항만 건설해 주고, 사회간접자본 투자해 주면서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만들겠다는 의도이다. 또한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과는 별개로 중국이 중심이 된 아시아투자개발은행(AIIB)도 창설했다. 등소평 때는 도광양회(韜光養晦)라고 조용히 힘을 키워왔지만, 이제 시진핑은 이른바 ‘신중국몽’을 내세우며 세계 패권국이 될 것임을 공언하고 있다. 첨단기술과 무역, 외교와 군사력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갈수록 치열해 질 것이다.”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의 힘은 어디서 나오나. “나폴레옹은 200년 전에 이미 중국을 잠자는 사자에 비유하면서 중국이 잠에서 깨면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라고 했다. 중국은 지난 2천년 동안 거의 항상 세계 GDP의 20% 이상을 차지해 온 최대 경제대국이었다. 단지 아편전쟁(1840~1842년) 이전 시기부터 1978년 등소평의 개혁개방 시기까지 약 150년간의 예외 기간이 있었고, 이 시기를 중국인은 ‘수모의 세기’라고 부른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앵거슨 메디슨 교수는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절정에 달했던 1820년대에도 중국의 GDP는 세계 33% 정도였다고 추정했다. 중국은 이런 초강대국이었고 중국인들의 의식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뿌리 깊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중국이 세계 중심의 초강대국이 되는 것은 잃어버린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정상화의 과정으로 인식한다. 중국의 가장 큰 힘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이 같은 국민의 강렬한 염원과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정치지도자들만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는 심지가 너무나 강하다.” -중국인들의 염원? 그것만으로 가능한가. “얼마 전 영국 파이낸셜타임즈지는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전략적인 사고를 하는 나라”라고 강조한 적이 있다. 서양의 국가들이 1주, 한 달 단위로 세상을 본다면 중국은 10년 또는 한 세기 단위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등소평은 ‘수모의 세기’를 거쳐 옛날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고개 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실사구시 차원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속에 들어와 실력을 키웠다. 이후 중국은 2001년 자유무역의 상징인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 가입해 비약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제 중국은 굳이 자신감을 감추지 않는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2~3번씩 만나 본 적이 있다. 정상회의에 배석하거나 키신저, 리콴유(李光耀) 등과 함께 한 자리였다. 볼 때마다 이들의 자신감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특히 2007~2008년 서방의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자부심은 더욱 북돋워졌다. 이제 시진핑 시대에 들어와 중국은 전 세계를 상대로 힘을 과시하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중국은 장기적인 국가 전략을 갖고 지도자가 바뀌더라도 이걸 이어가면서 단계별로 발전시켜 나가는, 대단히 전략적이고 실용적인 나라이다.“ -중국이 일정 수준 이상의 발전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한계에 부닥치거나 심지어 몰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없지 않다. “중국 사회의 심각한 빈부 격차에 따른 양극화와 금융부실의 심화, 정치적 민주화의 과제, 소수 민족 문제 등을 들어 그렇게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저명한 역사학자 폴 케네디도 1990년대 말에 우리 연구원에 와서 행한 강연에서 중국이 내륙과 해안지방의 격차로 분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산당 일당체제와 시장경제 체제가 공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유력했다. 그러나 그런 비관적 전망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위기 때마다 리더십을 잘 발휘해 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잘 파악하고 적절히 대처하고 있다고 본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중국의 고위정책 담당자들을 만나보면 수준이 대단하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꿰뚫고 있고 아주 국제화돼 있다. 이들은 세계 최고의 석학들과 전문가를 초청해 극진히 대우하면서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소화해서 자기들 것으로 만들어 활용한다. 중국에서 4차 산업 관련 벤처기업들이 세계가 놀랄 정도로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 노벨상 받은 미 콜롬비아 대학 에드먼드 펠프스 교수다. 3~4년 전 다보스 포럼에서 중국 리커창 총리가 자신의 고문인 그를 옆에 앉혀 두고 “매스 엔터프레누어십(mass entrepreneurship. 대중창업)의 아이디어를 이 교수한테서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중국은 세계 최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그걸 활용할 줄 아는, 대단히 실용적이고 열린 시스템을 갖고 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기회인가, 도전인가. “경제는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정치, 외교, 안보, 국방 등 다양한 여건, 특히 우리나라 같이 예민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나라는 지정학적 여건 변화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경제이론에서도 무역이나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지리적 조건으로 본다. 우리 바로 옆에 근접해 있는 나라가 세계 2대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이다. 이 중국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고 세계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우리 경제뿐 아니라 국가 생존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사드 문제 때 우리는 그 전조를 보지 않았나. 중국을 잘 알아야 하고 중국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중국은 자신을 천자(天子)의 나라로 여기는 인식이 뿌리 깊고 지금도 여전하다. 천하는 중국 중심의 질서 속에 움직이고 주변 나라들은 중국을 상전으로 모시는 질서에 익숙하다. 자칫 우리가 다시 무력한 중국의 변방 소국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분명 도전이다. 그러나 도전 못지않게 기회의 측면도 크다. 한국은 베이징, 상하이 등과 비행거리 2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다.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2시간 내에 갈 수 없는 도시와 땅이 중국 안에도 얼마나 많은가. 지리적으로 우리는 중국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이 지리적 이점을 잘 살린다면 중국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빠르게 발전하는 데 따른 급속한 도시화와 중산층의 급증은 우리 기업들에게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한국을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중국에 진출하려는 세계의 기업들을 끌어와야 한다. 교육개혁을 통해 우수한 인력을 키우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늘리며, 시대와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지 않는 각종 규제를 대폭 완화해야 한다. 이는 비단 중국을 염두에 둬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앞으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중국의 급속한 발전을 보고 있으면 속이 탄다. 각 분야의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우리가 확실하게 중국보다 앞서가는 분야를 확보하지 못하면 중국의 공세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사드 파동 때 중국이 제조업 분야가 아닌 관광산업에 국한한 압박을 가한 것은 우리의 대중국 상품 수출의 70% 이상이 그들의 수출과 내수용 중간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조업에서의 이런 우위가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중국의 ‘메이드 인 차이나 2025’ 계획은 2025년까지 중간재나 전략적인 품목들의 국산화를 대폭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우리의 중국에 대한 레버리지(지렛대)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AI나 드론 등의 분야는 이미 중국이 많이 앞섰다. 적어도 경제적 측면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한 노력으로 중국을 항상 앞서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나. “우리는 우리 특유의 지정학적 여건 속에서 남다른 국제적 안목으로 바깥세상 돌아가는 것에 잘 대응해야 한다. 한마디로 굳건한 한·미동맹 바탕 위에서 주변의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과의 외교·안보 관계도 잘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국내 정책마저도 항상 중국의 눈치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소위 “핀란디제이션(Finlandization. 핀란드화)” 처지를 면치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 수출의 지나치게 높은 대중국 의존도(약 25%)는 일본, 아세안, 인도, 중앙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지역과의 교역을 늘려 상대적으로 줄여나가야 한다. 또한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스스로 원칙을 지키는 나라로서 후발 개발도상국의 롤모델이 되고 그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개발경험 전수 등의 소프트파워 외교도 강화해야 한다. 현재 우리는 미국과 중국 관계 측면뿐 아니라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 속의 세계사적 큰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 정치권은 물론이거니와 국민 모두가 과거에 매몰되고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19세기 말-20세기 초반의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특히 중국의 변화를 보며 우리 모두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이다.” <상임고문>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