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민화 덕후’ 김세종 컬렉션 박물관서 전시하는 까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김세종 민화 컬렉션' 개막문자도·책거리·까치호랑이·무속화 등 70점 일반 첫 공개"민화는 순수회화...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문화 유산"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덕후'의 '덕질'은 불치병이다. 어떤 한 분야에 미칠정도로 빠진 사람. 그래서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찾아보는 행위는 '상사병' 못지않다. 어릴적 취미로 '덕질'은 추억이 되지만, 어른의 덕질은 '수억'을 버린다. 탐욕과 집착증이 하늘을 찌른다. 손에 넣지 못하면 "계속 눈에 아른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고", 손에 넣는 순간 "세상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그림에 빠지면 더 무섭다. 명품은 덕질로는 턱도 없다. 가짜와 진짜가 눈을 흐린다. 명품일수록 가짜가 훨씬 많다. 이때 필요한건 돈으로도 살수 없는 안목이다. 평범한 작품에서 남이 보지 못하는 명품을 골라내는 것. 진정한 덕질 능력자이자, 컬렉터의 카리스마다. 여기 이 남자, 남들이 현대미술 모을때, '민화'에 빠졌다. '돈 넣고 돈 먹기' 머니게임하듯 현대미술품을 수집하는 컬렉터들은 조롱했다. 시류에 뒤떨어진 허접한 것을 수집하는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다보니 오기 아닌 오기가 생겨 수집을 멈출 수 없었고, 언젠가는 꼭 민화가 세계의 문화가 되는 그 날을 위하여 작은 힘이지만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민화 덕후' 김세종(62)평창아트 대표다. '허접한 민화 수집가'에서 내로라하는 '민화 컬렉터'로 등극한 전시가 마련됐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김세종민화컬렉션-판타지아 조선 Fantasia Joseon'전을 18일 개막한다. 그가 20여년간 수집한 문자도, 책거리, 화조, 산수, 삼국지, 구운몽, 까치호랑이, 무속화 등 소장품 중 70여 점을 일반에게 처음으로 공개하는 전시다. 국내 대표 미술관급에서 개인의 이름을 단 대규모 컬렉터전은 처음이다. 덕후의 덕질이 취미가 아닌 예술이 된 셈이다. 17일 전시 개막을 앞두고 만난 그는 오기와 독기 사이에 있었다. "'검증도 안된 개인 작품을 관 전시장에서 전시하냐'는 말도 있던데 도대체 한심한 사람들"이라며 쓴소리를 냈다. 그는 "이건 내가 할일이 아니다. 벌써 학자들이 했어야 했다. 전수조사 해본적도 없고, 비 맞고 썪고 난리다. 스스로 정신을 차려야한다"면서 "민화는 세계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생의 절반을 미술품 수집이라는 화두를 쥐고 살아온 그는 최근 민화 수집 철학을 담은 '컬렉션의 맛'(아트북스)도 출간했다. "컬렉션을 무시하고, 평론글이 너무 어려워서 쓴 책"으로 생애 처음으로 쓴 책이다. '수업료 제대로 치른' 컬렉터의 생생한 이야기와 함께 역시 '민화의 세계화'에 역설한다. 민화를 상징이나 관념의 관점이 아닌 회화적인 관점에서 보기를 제안하며, 민화의 위상이 국내에서도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그는 "국립민화박물관을 세우고 민화의 대표작을 발굴해 세계인과 공유하자"고 주장한다. "민화야말로 우리가 해외에당당히 내놓을수 있는 자랑스러운 문화 예술품"이라며 "민,관,학계가 함께 연구하여 세계화할 필요가 있다"고 독기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민화 덕질'을 시작하게 된 것일까. '컬렉션의 맛'에 쓴 자서전같은 이야기를 공유한다.
처음부터 민화에 꽂힌건 아니었다. 덕질도 과정이 있다. 그가 "무엇을 수집하는데 처음으로 행복을 느낀 것은 20대 후반"이었다. 난초와 수석을 모으는 재미에 빠졌다. 예술가가 꿈이었던 10대 후반부터 서예에 입문했고, 인사동과 국립중앙박물관을 수시로 드나들다가 취미생활이 된 난을 접고, 이후 한국 현대미술과 고미술 수집에 다시 빠졌다. 수집은 사랑과 고통사이에서 피어난다. 30대 초반 미술품을 수집하면서 처음부터 사기를 당했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과 도자기가 사기품이었다. 마음고생이 심했고 이 일은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러다 일본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공예가의 길'과 '수집이야기'를 접하게 됐다. "이것이 내가 민화라는 장르를 수집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니까 가난한 한 상인이 17년동안 나름의 수집철학을 바탕으로 민화 수집에 매진 할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야나기 무네요시의 수집이야기에 대한 이해와 깨우침 덕분이다." '민화 컬렉션'의 시작은 30대 초반쯤이다. 고양이가 생선가게 들르듯 퇴근길에 종종 들르곤 했던 표구사에서 반딧불이 켜졌다. 표구사 주인 소개로 만난 원로 서양화가의 집에 간 어느날 벌어졌다. 난생 처음 보는 그림, 병풍으로 된 민화였다. "이 요상한 민화에 형언할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한 가운데의 문자 '효제충신예의염치'를 중심으로 상단과 하단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제주 문자도'였다. 낡아서 너덜거리는 병풍속 그림은 거칠고 우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책에서 또는 박물관이나 전시장에서 접한 민화들은 대부분 섬세하고 화려하며 스케일이 압도적이었는데, 이 병풍 그림은 정반대였다." 하지만 "피카소 입체파 그림과 유사하다"고 느낀 그림은 단 1,2분 스쳐 보았을뿐인데, "치졸미의 극치였다." 그날 밤, 그 그림이 계속 눈에 아른거려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다음 날 사무실 출근도 미루고 표구사로 간 그는 "어떻게하면 어제 본 그 민화를 살 수 있냐"고 물었다. "화가가 워낙 그 민화를 좋아해서 쉽게 팔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은 안달이 나게 했다. 한 두 달을 매일같이 채근해도 계속 어렵다고만 했다. 수집가의 병이 도지는 건 이때다. '좋아하는 작품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신념은 '버려야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득도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제주 문자도'에 홀린 그는 당시 애지중지하던 3점의 작품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4호 크기 고려불상 복장 유물 2점과, 고려 화엄경 두루마리를 들고 표구사 주인을 찾았다. 다음날 민화가 나왔다고 연락이 왔다. 아주 어렵게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제주 문자도'는 그가 처음으로 입수한 민화다. 그는 "컬렉션 초보자로서 처음 수집한 민화는 스릴있고 재미있는 아주 도전적인 거래였다"면서 "당시 800만원 정도 들어간 것 같은데 과연 민화 병풍이 세 점의 소장품과 바꿀만한 경제적 가치가 있었는지 따위는 비교해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제주문자도 병풍의 경제적 가치나 예술적 가치에 관해 명쾌히 말할 자신은 없다"면서 자신의 안목을 신뢰하려고 애쓴다고 했다.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다. "가끔 이 민화 병풍을 유명 옥션에 출품한다면, 과연 얼마짜리가 될지 생각해보곤 한다."
컬렉션의 세계는 고독과 절망 희열을 오가게 한다. 돈이 원수다. IMF가 터진후 2년간 쓰라리게 맛보았다. "마음을 비우고 미술을 즐기면서 여유있게 살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컬렉션 맛'은 미술상인으로 제 2인생을 살게 했다. 2006년 6월 평창아트갤러리를 열면서 '민화 수집병'에 발동이 걸렸다. 한 컬렉터에게서 받은 1000여점의 민화를 정리하면서 "민화는 회화다"는 개념이 생겼고, 작품을 선별하면서 '모은다는 의미가 무엇인가'하는 컬렉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도 들기 시작했다. "내가 수집한 민화가 그만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만하고, 또 가난한 수집가의 열정을 불태울 만한가가 고민"은 2010년 '까치 호랑이전'을 연후 힘을 얻었다. 당시 전시는 수집전문가들의 호평속에 성황리에 열려 "결과적으로 나름의 확신을 얻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민화를 수집할수 있었다."
“민화가 회화로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장점은 인간적인 그림이라는 것이다. 민화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가장 솔직하고 진솔하게 담아낸 그림 아닌가. 이보다 더 가치 있는 표현의 세계가 어디에 있을까.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해학과 추상이 곁들여진, 독창적이며 매혹적인 그림 아닌가. 이러한 민화를 세계인에게 알려서 새로운 문화로 꽃피워야 할 시기가 왔다.” 그는 민화의 세계화를 위해 앞장선 이우환 화백의 일화를 상기시켰다. 이 화백이 일본에 흩어져 있던 민화를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립 기메동양박물관에 기증한 것과 관련, "귀중한 명품 민화를 외국에 기증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민화의 세계화를 위해 얼마나 고뇌하고 고심했는지를 짐작할수 있었다"면서 "민화의 세계화에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뜻으로 이우환의 기증을 이해했다"고 했다. 이우환이 외국박물관에 기증한 사연이 있다. 국내 미술관에 민화 수집품을 기증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당시 미술관계자들이 민화에 무관심했고, 가치에 어두웠다. 기메동양박물관에 안착한 민화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 박물관에서는 2001년 10월부터 2002년 1월까지 '한국의향수'라는 타이틀로 17~18세기 한국 고미술 전시가 열렸는데 이때 문자도 산수도 화훼도 조충도 풍속도등 이우환 화백이 기증한 민화 130여점이 소개되었다. 김세종 대표는 "민화는 순수 회화이고 세계적으로 불가사의할 정도로 뛰어난 회화"라고 극찬했다. "민화의 진면목은 추상미와 해학미에 있다"는 그는 "민화에 내재된 추상미는 서양미술이 추구하는 추상미와 통한다. 민화는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회화의 본질에 충실한 그림이다.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민화는 19세기말 부흥기였다. 당초 양반의 전유물에서 중인에게까지 퍼져나갔고 수요가 늘자 민화작가들이 팔도에 넘쳐났다. 민화작가의 이름이나 생몰연대등을 알수 없는 이유다. 김 대표는 "우리 학자들이 민화를 실용화 상징화 장식화라고 규정하고 그 틀속에서 연구하다 보니 공예미나 민예미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민화 작가가 화원 출신이 아니라는 것과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아서 허접하다는 인식하에 회화적인 관점을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실제로 민화는 붕어빵 틀속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 그림이 아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재미있는 구상과 추상이 결합한 오묘한 독창성이 빛난다. 조선 오백년간 우리 민족이 만든 서민의 그림으로 조선 말기에 이르러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했다. 1970,80년대 민화는 일본 관광객에 의해 수없이 팔려나갔다. 표구사에서 한달에 한 컨테이너씩 표구하여 일본에 보낼 정도였다. 일본과 프랑스등 외국에 헐값으로 내보낸 민화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세종 대표는 "그들은 왜 한국의 민화를 수집했는지, 궁중 장식화를 수집하지 않고 떠돌이 무명화가가 그린 그림만 골라갔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짚었다. "요즘 신세대나 민화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민화가 생소한데다가 심지어 무섭다는 말도 한다. 오히려 우리보다 외국인들이 민화를 친숙하고 편하게 느낀다. 우리처럼 민화에 대한 관념이나 선입견이 없으니 오히려 순수하게 회화적으로 감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치게 서구 편향적인 환경속에서 우리 것에 소홀하다 보니, 우리 것이 더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기이한 상황이다." 해방후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민화에 대한 본질이나 개념에 대한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민화'라는 명칭도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이름 붙인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민화를 공부하고 그리는 인구가 20여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도 민화는 여전히 주류 미술에는 들지 못하고 있다. 김세종 대표는 "1960,70년대 민화 운동을 할때 민화가 왜소하고 초라하게 보여 궁중 장식화를 끌어들인 미술계의 실수가 있었다. 첫단추부터 잘못뀄다. 지금까지 민화에 대해 예술적인 회화개념보다 민예적인 관점에서 연구하고 보아왔던 민화 연구자들의 모순된 불균형을 이제 우리가 풀어야 하는 숙제로 남았다"며 "우리 민화를 하나의 실용 장식화로만 치부하기에는 그 안에 너무 많은 것이 가득 담겨있다"고 지적했다. '김세종 민화컬렉션 - 판타지아 조선 Fantasia Joseon'은 '민화가 순수회화이고 세계적'이라는 것을 증명해보이기 위한 전시다. "어렵게 진행된 전시다. (반응이)두렵다"고 하던 그는 "전시된 걸 보니 나도 고생 많이 했구나. 뿌듯하면서도 만감이 교차한다"며 설레임을 감추지 않았다. 민화는 조선시대 봉건질서의 해체와 전환 현상을 정확하게 담아낸 조형언어다. ‘민중이 그린 우리 그림’이라는 이유로 소박함만 부각했던 고정관념에 신선한 충격을 가한다. 1300여점 수집품중 엄선한 70여점은 덕후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컬렉션은 또 하나의 창작'이라는 것을. 전시는 8월26일까지.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