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 삿됨 없는 여인상...최종태 '영원의 갈망'
국내 가톨릭 성상 조각 대가...길상사 '관음보살상'도 제작대리석에서 채색 목조각까지 "60년간 순 조선사람 얼굴 연구"대형 파스텔화등 40점 전시...가나아트센터에서 11월 4일까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온 세상을 돌고 돌았다. 팔십이 될 무렵에서야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파도가 잔잔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기나긴 밤을 지새울 때 별들로부터 한량없는 은혜를 입었다." 아흔을 앞둔 그는 “이제야 아름다움의 원천은 기쁨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얻기를 갈구하는 것, 행복이란 것도 바로 이 기쁨일 것이다. 모든 가치는 기쁨으로 통한다. 그것이 신의 한 쪽 모습이 아닐까." 신(神)을 이야기하는, 그를 설명하기위해서는 20여년전으로 돌아가는게 좋을 것 같다. 1999년 종교간 벽 허물기가 한국종교들의 숙제였다. 당시 법정(1932~2010) 스님은 누구 못지않게 그 숙제를 풀고 싶은 염원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서울 성북동의 유명 요정을 위탁받아 절로 개창한 길상사에 세울 관음보살상을 한 조각가에게 의뢰했다. 2000년 길상사 설법전 앞에 세워진 '관음보살상'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화제였다. 종교간 화해의 염원이 담긴 작품은 그야말로 금기의 벽을 허물었다. 개원법회 때 고 김수환 추기경이 개원축사를 했고, 승려와 수녀가 만드는 음악회가 열리고 종교를 초월한 화합과 만남의 장이 됐다. 성모상 같은데 머리에 화관을 쓴 '여자 부처'였다. 여섯 개의 봉우리가 솟은 관을 쓰고 있는 관음보살상은 국보 제83호 삼산관반가사유상과 이미지가 비슷하다. 부처상을 순진무구한 여인으로, 관음상과 성모상을 하나로 합체시킨 건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조각가 최종태(86·서울대학교 명예교수)였다. 당시 성당 성물 제작에 한창이었던 최종태는 법정스님의 의뢰를 받고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 젊은 날 불경을 공부했을 무렵 우연히 성경이 손에 잡히자,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통독했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성경에 빠져들었다는 그는 조각가로서 관음상과 성모상의 조형미는 하나로 다가왔다. "성모마리아가 되었건, 관음보살이 되었건 다른 것은 외향이지 본 뜻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 "그러니 예술도 종교도 근원으로 가는 방편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생 '여인상'에 천착해 온 최종태는 성상 조각의 대가로 더 이름을 알렸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단순한 선, 평면성과 정면성을 갖는 조각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초월한 형태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1958)출신으로 국내 추상조각의 대부 김종영(1915~1982)의 제자이자, 단순한 동화같은 그림 장욱진(1917~1990)의 문하생이다.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 중심과 주변, 예술과 종교 등을 갈라서 나누지 않고 끌어안았다. 예술적 실천을 통해 본질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다가가고자 긴 시간을 겪어냈다. 1980년대에 사회적 불안을 작품으로 표현한 '도끼형 여인상'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고요하고 순수한 정신성'을 지향했다. 늘 '조각이란 무엇인가?'가 화두였다.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계속됐다. 그러다 쉰 흔살이 되든 해, 어떤 날 아침 눈을 막 뜨는 순간이었다. 그는 ‘조각이란 모르는 것이다’ 하는 환한 답이 왔다며, "내 평생 그때처럼 기쁘고 신나는 날은 다시 없었다"고 했다.
지난 11일부터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23회 개인전을 열고 있다. 근래에 제작된 채색 목조각과 이전에는 시도 되지 않았던 대형 파스텔화와 조각의 분신 드로잉을 대거 선보였다. 볼펜, 사인펜, 연필 등으로 그린 소묘화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모던보이 같았다. 중절모를 쓰고 양복을 입은 그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자신의 조각상 하나하나를 애정있게 바라보고 매만졌다. 그러자 얌전하게 서 있는 작품들이 표정을 달리하며 마주했다. 평범한 할아버지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는 세상 만물 이치에 통달한 도인 같았다. 1932년생 대전 출생으로 서울에서 산지 60여년이 됐지만 느릿느릿한 말투와 충청도 사투리는 여전했다. ▲드로잉 속 여인은 누구인가. -글쎄. 서양에서도 그걸 자꾸 물어. 누구 얼굴이냐고. 그때도 '한국사람'이라고만 했지. 누굴 보고 그린 적이 한번도 없어. 미술대학 1학년때부터 그랬어. 머릿속에 있는 것, 평소에 본 걸 그리는 거지. 이번 전시 개막식때 김병기 화백이 '한국사람 얼굴이다' 그러더라고. 맞아 한국사람이지. 전시장에서 한 작품 한 작품으로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좋다'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다리를 모아 앉아 있는 여인상은 테라코타 같다. -테라코타 같이 보이는데, 흙물을 칠한 거야. 옹기 만드는 흙(점토)을 접착제(본드)를 개서 바른거지. 코팅이 되어서 비가와도 괜찮아. 안에는 나무야. 페인트를 안하고 흙물을 칠한거지. ▲작품에는 철에 소금을 칠해 부식을 낸 것도 있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편인가. -어딘가 흠이 있으니까…. 칠을 하는 작품이 된 거지. 처음엔 칠할 생각을 한 건 아녀. 오래 하다보니까 채색 목조가 됐어. 자연스럽게 이뤄졌지. 이 하얀 것은 백토로 한거여. ▲어떤 나무로 조각하나. -은행나무가 많아. 깎기가 좋지. 연하고. 그리고 은행나무는 좀이 안먹어 오래둬도 되는 특성이 있어. 그래서 한 것은 아닌데. 결이 없어서 좋아. 저 쪽에 칠 안한 나무가 그대로 있어. 보면 알거야.
▲빨간치마, 초록 저고리를 입은 여인상은 둥근 탈을 쓴 안동탈춤이 생각난다. -조선풍속인데 옛날 시집가기 전에 홍삼을 입은 거여. 새색시지. 서양사람 냄새가 없지. 순 조선사람이여. 이를 연구하는데 60년 걸렸어 단번에가 아니라, 오래 걸리는거여. ▲두 사람 얼굴인데 한 손으로 합장했다. 일타쌍피다. -두 사람을 하게 된 것도 50년 됐네. 1967년 무렵부터 연속적으로 했지. 왜 했냐고? 그건 나도 모르지. 혼자 놀면 외로워 둘이 된거 같아. 손은 하나로 왜 합장했냐고? 나도 몰러. 그냥 되는 거여. "미술사를 보면은 이렇게 비슷하게 붙이는 게 있는지는 몰라. 내가 세계 미술사 5000년 속에서 붙이는 조각을 나 혼자했다고는 할 수 없어. 과거 아프리카에도 있을 수가 있지. 하지만 난 그런걸 보고서 한 것은 아녀. 두 사람 붙인 것도 몇십년 됐어. 따로 따로 하다가 붙었지. 나무를 깎다가 자연스럽게 붙은거여~." ▲턱을 고인 이 여인상은 반가사유상이 생각난다. -반가사유상이 좋아서 이렇게 되는 것 같어. 그림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나 혼자 되는게 아니여. 역사하고 상관있지. 어떤 사람이 나 혼자 했다고 하는건 함부로 믿을게 아녀. 내 머릿속에 세계가 연결되어 있어. 어떤 하나가 아니라 동양도 있고, 서양도 있고 아프리카도, 멕시코도 있고, 다 있는거여. 나보고 설명하라고 하면 괴로워. 어떤 걸 얘기해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는 '반가사유상'을 예찬했다. 1967년부터 반가사유상에 빠져 50년째 좋아한다고 했다. ▲왜 반가사유상인가? -세계미술사에서 좋은 걸 뽑으라하면 '반가사유상', '석굴암', 일본에 있는 '백제관음입상'이다. 왜 좋으냐고? 한 가지 예만 들자면 고대 그리소 조각은 형태미여. 반가사유상은 정신을 갖고 있지. 아주 높은 정신을 가진 어떤 형상… 비너스는 그게 없다. 석굴암 불상이나 반가사유상은 세계 조각사에서 최고여. 양면(형태+정신)을 갖고 있다고. 그렇다고 턱에 팔을 괸 포즈를 한 작품이 반가사유상을 생각하면서 한 건 아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나도 몰라. 찰나 순간에 달렸지. 모두 미술사하고 연결이 되는 거여. 그런데 결국은 나도 반가사유상 거기에 가고 싶은 거여.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것. 거기로 가고 싶은 건데 내 마음대로 되는게 아녀. 내가 그 경지에 가야지. ▲여인상은 대개 슬퍼보인다. (짐짓 놀라는 표정으로) 그래? 하더니 말을 멈췄다. -내 작품이 '슬픈끼'가 있어. 최근 몇 년 동안 한 작품에는 그게 벗겨졌다고 생각했는데... 86년에 서양에서 전시를 하는데 한관람객이 나한테 와서 "왜 이렇게 슬픈 모습을 하고 있냐"고 묻더라고. 나는 그때도 그걸 상당히 벗겼다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본거여. 그래서 다시 보니까 방 전체가 슬퍼보이더라고. 그래서 밖에 카페에서 한참을 울다왔어. 그러고 3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래?....왜 그렇게 됐나. 어렵게 살아서 그려. 우리 시대가. 난 일본시대 살고, 해방 보고 6.25를 봤자녀. 또 집이 어렵게 살아서 그게 묻은것 같애. 그걸 벗어나려고 몇십년을 했는데...그런데 아직도 있다면은...내가 보기엔 많이 벗겨진 것 같은데, 그런데 용케 잘도 봤네. 허허허~"
전시장에는 '명상의 공간' 같은 방이 따로 마련됐다. 은행나무 그대로를 깎은 조각이 기도하 듯 서 있어 경건함을 전한다. 장승 같고, 엄마같기도 하고, 또 성모상 같기도 한 모든 형상이 아우러지는 모습으로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그래서 예술가라고 하는 것은 뭐를 공부하는거면 세계미술사는 기본이여. 또 거기서 벗어나야 되는 거여. 벗어나야 내 작품이여. 그런데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거냐면, 죽었다 깨어나야 돼." "세계 미술사에서 벗어나야 내 그림이 된다"는 그는 "내가 얼마만큼 벗어났나"가 궁금하다고 했다. "정신력과 모든 체력을 소모해서도, 예술가가 안될 확률이 더 많아. 나도 그게 됐는지 안됐는지는 몰라. 난 어느 정도 됐다고 보거든. 그거를 사람람들이 봐야 돼. 얼만치 벗어났나. 나는 후배들 그림 보면 그게 보여. 넌 여기 있다, 여기 있다... 나를 그렇게 봐줘야지. 나는 어디있을까. 아~허허허." 여인상들은 한국사람 얼굴이기도 하지만 세계인의 얼굴이다. 모딜리아니의 긴 얼굴 형상이 떠오르는 조각앞에서 '모딜리아니'를 이야기하자 그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세계미술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지만, 또 다 연결돼야지. 어디든지 다 연결되면서 거기로부터 떠나야돼. 잘 생각해보셔. 내 조각에는 아프리카도, 이태리도, 현대도 있지. 내가 다 공부했으니까. 그런데 거기에 메이면 안된다 이거여. 거기서부터 벗어나야해. 화가는 그런 공부를 하는거여." 손오공 예를 들었다. "손오공이 진리를 찾아서 인도를 가는데 별별 요괴를 만나잖아. 손오공처럼 나도 긴 터널을 지나왔어. 별별 요괴들과 싸워서 다 이겨야돼. 예술가는 그래서 승리한 사람이여." 그는 20세기 대표 현대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를 좋아한다. '먹빛의 자코메티' 화문집을 낼 정도였다. 사르트르가 자코메티에 대해 쓴 "저 사람은 승리하고 있다"는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예술가는 터널의 싸움을 다 이겨내서 승리한 사람'이라는 거지. 예술가는 그걸 해야돼." 작품은 인물상에 치중되어 있지만 작가는 삶의 본질과 진실된 내면을 작업에서 찾고자 했다. "많은 것을 보고 다 소화한 연후에야 내 눈이 자유로워진다. 그래야 사물이 진짜 자기 모습을 보여준다. 예술가는 참 모습을 그려야한다." "그걸 80이 될 무렵에야 알았다"고 했다. "혼자 노력으로 되는게 아니여. 별, 풀, 나무 모든 인류 다 도움으로 왔지. '온 세상을 돌고 돌았다....기나긴 밤을 지새울 때 별들로부터 한량없는 은혜를 입었다' 이 말은 거짓말이 없어. 확실하게 내 속에 있는 것을 정리한 거여. 발로 못 갔으면 책으로도 다 돌았어. 나는 거짓말 안해." 이제사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는 그는 "지금은 내 형태들이 조용 하다는 얘기다. 내 속에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 형태에는 한국의 역사가 배어 있어. 굉장히 많이 있지. 보는 사람은 봐." 그러면서 100세가 넘은 김병기 화백이 자신의 전시를 보고 한 마디로 '한국인의 얼굴'이라고 표현한 것에 매우 만족해했다.
그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괴테)는 말을 새기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 "선배들이 어떻게 그리나 살피다가 일제시대 미술을 보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한 일, 민속미술로부터 고급미술에 이르기까지 연구했다. 그리고 중국 미술, 아시아 미술, 제 3세계권의 미술을 총체적으로 검토했다." 예술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돼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우리나라처럼 식민시대를 살고 동족전쟁을 겪고 여러 가지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그것과 예술이 무관하다는 말은 설득력이 모자란 것 같다"며 여인상과 성상 조각가로만 알려진 작가의 의외의 면도 보였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스승의 품에서 벗어나는 일과 세계 미술사로부터의 자유였다"는 그는 "둘 중에서 스승(김종영)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더 힘들었다"고 했다. "불경인 금강경에 보면 집착하는 바가 없으면 자유로워진다는 '음무소주'(應無所住)라는 말이 있다. 피카소다 비너스다 반가사유상이다 집착이 되지않고 거기서 부터 나와야 된다는 얘기다. 공자는 '사무사'(思無邪)라 했다. '삿됨이 없어야 된다'는 얘기다. 예수도 성경에 이야기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느님을 볼 것이다. 하느님을 만난다는 얘기는 자유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결국은 석가모니나 공자나 예수나 똑같은 말을 했다. 어디고 메인 바가 없는 마음을 찾아라 이거여. 쉽게 말하면 욕심이 없어야돼." 어떻게 욕심을 없앨수 있냐고? "그러니까 그걸 다 정리하면 '승리'라는 단어를 줘도 된다는 거여.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얘기지. 그림도 마음이 깨끗한 연유에 되는 것이지."
이번 전시에 처음 선보이는 둥글둥글한 푸른 섬이 인상적인 대형 파스텔화앞에서 깨끗한 마음이 된 듯했다. "내가 1970년대 학생들하고 일년에 한번씩 수학여행을 갔어. 저긴 남해섬을 갔을때인데 그때 작게 그린 것이 있었어. 최근에 그걸 보고 그렸어. 머릿속에 있는걸 지금까지도 계속 그리는 거여. 저런 섬이 있는 것이 아니여. 틀렸대도 할 수 없어. 내가 만든 섬이지. 내가 만들면 되지 안될게 뭐 있나.허허허." 유한한 인생을 살기때문에 무한을 꿈꾼다. 말로 다 되는 AI시대, 인간 정신은 삭막해지고 있다. 그래서 예술은 더 위세다. 단지 인간의 형상일뿐인데 경건한 감성의 세계로 인도하는 최종태 조각은 '힐링 선물'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시구가 떠오른다면, 놓치기 아까운 전시다. '영원의 갈망'을 타이틀로 40여점을 선보인 이번 전시는 가나아트센터 1, 2, 3관에서 11월 4일까지 이어진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