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봄 몰고은 '옛날 그림'의 마력...'도상봉·장욱진'展
6일부터 노화랑서 '근현대 대가' 사후 첫 2인전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제대로 '그림 맛'을 전한다. 매끈하고 사진같은 '요즘 그림'이 아닌 텁텁한 물감 맛이 진득한 '옛날 그림'이 새 봄을 몰고 왔다. 도상봉(1902~1977), 장욱진(1917~1990)의 사후 첫 2인전이 열린다. 서울 인사동 노화랑(대표 노승진)이 6일부터 펼치는 이 전시는 우리 '근현대 대가'의 면모를 뽐낸다. 도상봉과 장욱진은 국내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화가들이다. 국내 주요 컬렉터들의 빼놓을수 없는 그림으로 생전 인기를 구가했고, 이젠 비싼 가격표를 달고 경매장이나 미술관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작품이 됐다. '한국미'가 바탕인 공통점이 있지만, 도상봉과 장욱진의 화법은 완전히 다르다. '라일락'꽃 그림으로 유명한 도상봉이 정직하고 섬세하게 정물과 풍경을 그렸다면, '아이같은 그림' 장욱진은 사물을 최대한 생략해 유쾌한 동화처럼 담아냈다. '그림 맛'이 다른 배경이 있다. 도상봉은 서양화 도입기의 기술적인 과정으로서 아카데믹한 훈련을 쌓은 모범형이다. 장욱진은 초창기 서양화 과정을 지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성장한 일탈형의 예술가다.
"도상봉이 모범형의 대표적인 작가란 것은 당시 아카데미즘의 본상이라고 할 수 있는 동경미술학교(현 동경대학 예술학부) 교육 시스템에 영향을 충실히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에 비하면 장욱진은 한국인의 일본 유학이 보편화되었던 30년대 후반에 해당되는 경우로서 미술수업의 초기적 현상을 벗어나 비교적 자유스럽게 미술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던 시기에 미술가로서의 길에 들어선 경우다."(오광수 미술평론가) 독보적인 화풍을 구축한 두 명의 화가는 우리나라 서양화의 근대화 시점과 같이 한다.
도상봉은 함경남도 홍원읍 남당리 출생, 함경보통학교를 나온 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보에서 공부했다. 일본 명치대학 법과에 입학했지만, 1년 후 동경미술학교로 옮겨 미술공부를 했다. 나비넥타이를 즐겨했던 그는 새로운 유화기법을 알리고자 ‘숭삼화실’이란 이름의 유화교실을 열어 후학을 지도하기도 하였고, 해방 후에는 숙명여대에 잠시 재직하기도 했다. 정적이고 고전적인 화풍과 달리 미술의 대 사회적 저변확대와 제도 마련에 열정을 가졌던 운동가적인 면모를 갖춘 화가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55년부터 대한미술협회 위원장,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전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며 미술계 제도권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백자와 라일락을 소재로 다룬 정물은 '우리나라 고유의 정감을 화폭에 담으려는 깊은 관조(觀照)'를 보여 준다. 백자 항아리와 그 속에 꽃이 가득히 꽂힌 심플한 구도로 화면을 채웠다. 그래서 '한국 인상파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과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고전적 사실주의와 한국적 아카데미즘의 원형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이같은 그림' 장욱진은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의 거장 중 한 명이다. 아카데믹한 예술영역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조형의 진폭을 보여줬다. 충청남도 연기 출신이다. 양정고보 3학년으로 편입했고, 조선일보 주최 ‘전조선학생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이 수상을 계기로 집안 어른의 후원을 받아 1939년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1944년에 졸업한 이후 귀국하여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과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1952년까지 동인전 활동을 했다.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등을 맡았으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잠깐 재직하기도 했지만 덕소, 수안보 등 조용한 시골을 찾아 평생 작업에만 매달렸다. 그는 일상의 풍경과 소재들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압축하여 표현했다. 까치, 가족, 새, 나무, 마을, 아이 등 지극히 소박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순수함과 선함을 표현하며 자신만의 초연한 예술세계를 정립했다. 점차 스며드는 듯한 묽은 안료의 구사와 이에 걸맞은 자유분방한 표현이 특징으로 순발력에 의해 순간적으로 포착되어 그려졌다. 먹물의 농담과 붓의 움직임, 결의 모양에 따라 모필의 일회성을 표현함으로써 장욱진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생전 '나는 심플하다'고 주장했는데 절제와 요약에서 말년에 자유와 해방으로 나아갔다. 그림은 풋풋한 기운 속에 해학이 넘치는 장면이다. 마을 앞으로 난 길에는 아이와 강아지가, 때로는 소와 새가 등장한다. 마을의 노인이 나타나고 집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가족들의 모습등 자연과 인간이, 인간과 동물이 어떤 위계나 어떤 차별도 없이 어우러지는 '귀의의 세계'가 펼쳐진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도상봉이 우리의 백자를 자신의 화면 속에 부단히 들였다든가 장욱진이 우리 전 시대의 풍경을 되살려놓았다는 단순한 사실만이 아니라 이들은 예술을 관류하는 소박함과 격조, 균형과 자유의 구현이란 정서의 공감에서 우리 미술을 한층 풍부히 가꾼 독창적인 작가들"이라고 평가했다. 도상봉·장욱진의 명작중 명작 20점이 모인 이 전시는 40년 인사동 터줏대감 노화랑 노승진 대표의 연륜이 빛을 냈다. 미술관이 아닌 상업화랑에서 흔치 않은 기획전으로 '근현대 대가-비싼 작가' 작품 섭외는 신용과 인맥의 힘이다. 보험가액만 30억치다. 이 전시는 그림이 안팔려 불황이라는 국내 화랑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 대표 그림'인양 유명해진 단색화만 그림이 아니다. 작품값에 밀려 사라지는 옛날 작가와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의 아름다움을 재조명해야 할 때다. 미술은 감각을 깨운다. 기계에 의존하는 시대에도 손 맛 그림이 죽지 않는 이유다. 색다르고 화려한 것만이 대세가 아니다. 그림은 정서를 회복하게 하고 옛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한다. 죽은 그림도 살려내는게 화랑의 임무다. 화폭을 터트릴듯 만개한 라일락, 천진한 동심의 세계가 빼꼼히 고개 내민 봄을 일어서게 하고 있다. 전시는 20일까지. 관람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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