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선언 1주년]'운전자'부터 '당사자'까지…험난했던 文의 비핵화 여정
獨 쾨르버재단 연설 '한반도 운전자' 천명…담대한 여정 출발거듭된 인내심으로 유화 메시지…결국 北 도발 시계 멈춰위기 때마다 중재·촉진 역할…남북 3회·북미회담 2회 견인'하노이 노딜' 북미 교착 장기화 국면…촉진 노력 지속 다짐
2017년 7월6일 독일 베를린 구(舊) 청사인 알테스 슈타트하우스에 울려 퍼진 문재인 대통령의 한마디는 마냥 허황된 꿈만은 아니었다. 과거 독일 통일조약 협상이 이뤄진 곳에서 전 세계에 천명한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구상은 손에 잡힐 것 같은 가까운 현실로 다가왔다. 과거 김대중 정부의 '베를린 선언'을 계승하겠다던 문 대통령은 17년 후 이뤄진 쾨르버재단 초청연설을 무대 삼아 현 정부의 대북정책 뼈대를 이루고 있는 '신(新) 베를린 선언'을 공개 천명했다. '신 베를린 선언' 속엔 궁극적으로 핵·전쟁 위협이 사라진 한반도를 희망한다는 염원 아래 한반도 비핵화, 종전과 평화협정 체결, 한반도 신 경제지도 구상, 이산가족 상봉, 남북 간 민간교류 확대, 평창동계올림픽의 북한 참가, 군사분계선에서의 상호 적대행위 중단, 남북 정상회담 개최 등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필요한 모든 구상이 담겨 있었다. 그 중에서 단연 주목받은 것은 '한반도 운전자론'이었다. 한반도 문제의 직접 당사국으로 전쟁의 비극을 다시 겪게하지 않도록 평화 분위기 조성을 위한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를 담은 대북정책을 나타내는 이름이었다. 문 대통령은 연설에서 앞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을 언급하며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통일 환경을 조성함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주도적 역할을 지지했고, 남북대화를 재개하려는 나의 구상을 지지했다"며 북한이 핵도발을 멈추고 대화의 장으로 나올 것을 촉구했다. 문 대통령은 이러한 '한반도 운전자론'을 바탕으로 이어진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기조연설을 비롯해, G20 계기로 마련된 정상회담 자리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정부의 의지와 노력에 대한 지지를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또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시험을 유예하거나 핵실험 중단을 천명했던 시기는 예외 없이 남북관계가 좋은 시기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며 "제가 기회 있을 때마다 한반도 문제의 주인은 우리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운전자론을 강조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화해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미사일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 14형을 잇따라 쏴 올리며 핵무력 완성을 위한 단계를 밟아나갔다. 급기야 같은 해 9월6일에는 6차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그러자 문 대통령이 수없이 되뇌였던 '한반도 운전자론'도 호응이 없는 북한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 여론이 여기저기서 제기됐다. 남북이 힘을 모아 주도적으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노력해 나가자는 메시지가 구호에 그칠 수 있다는 인색한 평가도 나왔다. 문 대통령은 우선 당장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무력에 의한 대북 억제력 확보 정책을 병행했다. 그동안 미뤄왔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잔여 발사대의 임시 배치를 결정하기도 했다. 그 사이 북한은 11월29일 급기야 ICBM 화성 15형의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겠다는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018년 신년사를 계기로 분위기는 급반전 됐다. 대화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이어온 문 대통령은 북한의 ICBM 성공 발사 속에 담긴 대화 메시지를 읽어냈고, 서훈 국가정보원장의 물밑 대화를 통해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하겠다는 김 위원장의 신년사를 이끌어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신년사에서 "남조선에서 머지 않아 열리는 겨울철 올림픽 경기대회는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며 "우리는 대표단 파견을 포함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과 문 대통령은 2~3월 각각 당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남북 특사로 파견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와 4·27 판문점 1차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취임 첫해 비판 여론에 시달렸던 '한반도 운전자론'은 다시금 힘을 얻게 됐다. 남북대화 재개를 위한 문 대통령의 그간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 국제사회에 증명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미국 유력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지난해 4월 2018년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을 선정하며 그 중 하나로 문 대통령을 뽑았다.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국대사가 '위대한 협상가'(The Great Negotiator)라는 이름으로 문 대통령을 추천했고, 타임지가 리퍼트 전 대사의 추천을 수용했다. 문 대통령이 한반도 운전자론을 통해 1차 남북 정상회담을 이끌었다면, 이후 국면에서는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양측의 입장을 조율하는 문 대통령의 중재 외교력이 집중 조명을 받았다. 지난해 6월 사상 첫 북미 정상 간의 회담을 성사시킨 데에는 문 대통령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비록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 직후 6·12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하는 등 한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문 대통령은 5·26 판문점 2차 남북 정상회담 카드로 돌파했다. 그로부터 석달 뒤인 지난해 9월 평양 3차 남북 정상회담과 '평양 선언'을 통해 북미 정상이 두 번째 마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냈다. 비록 합의는 무산됐지만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열리게 된 과정 전반에 문 대통령의 중재 노력이 묻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미 대화의 교착상황이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북한으로부터 문 대통령의 역할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도 사실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2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남조선 당국은 추세를 보아가며 좌고우면하고 분주다사한 행각을 재촉하며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것 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리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며 현 국면을 풀기 위한 보다 적극적 역할을 주문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의 이러한 불만 섞인 발언은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지난달 15일 평양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문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 언급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최 부상은 당시 "지금 시점에서 남조선(남한)은 중재자 역할을 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중재자는 조미(북미) 회담에서 그 어떤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것이 없어야 한다"면서 "그러나 남조선은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당사자 격"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미 대화의 교착 상황을 풀기 위한 모멘텀이 필요하다는 게 여전한 문 대통령의 인식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25일 아시아뉴스네트워크(ANN) 이사진 초청 간담회에서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김정은 위원장을 만날 것이고, 북미 대화 또한 촉진할 것"이라며 중재자·촉진자로서의 노력을 계속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