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범모 관장 "내 생일날 같다"...'근대미술가의 재발견1' 개막
덕수궁관에서 '절필 시대'...저평가 근대기 작가 6명 발굴 재조명정찬영 백윤문 정종여 임군홍 이규상 정규 작품 134점 전시정종여 6m '의곡사 괘불도' 국내 미술관 최초 공개
【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내 생일날 같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1980년대 미술평론가로서 발굴한 정찬영과 임군홍의 작품을 미술관장이 되어 재조명한다. 덕수궁관에서 30일 개막하는 '근대미술가의 재발견1:절필시대'전은 그래서 감회가 새롭다. 윤 관장은 "임군홍은 당시 발굴해서 회고전도 했고 논문도 썼는데 오랜만에 한자리에서 보니까, 진짜 나의 청년시절이 떠오른다"면서 "많은 근대미술을 발굴하려고 품을 많이 팔았었는데, 덕수궁미술관에서 한 자리에 나온 좋은 작품들을 보니 개인적으로 축복과 같은 전시"라고 설레했다. 윤 관장은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근대미술사 전문가다. 현재는 현대 미술만 득세하는 시대다. 이런 상황속에서 윤 관장은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우리 미술사에서 저평가된 근대기 작가를 발굴 재조명함으로써 한국 미술의 두터운 토양을 복원하겠다는 의지다. "우리 미술 근대기가 너무 죽었다. 가격도 없고, 미술시장이 문제가 있다. 뿌리를 모르니 해외에서 대우도 못받고 있다. 앞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20세기 한국미술사에서 소홀히 다루었던 작가를 발굴, 향후 3년 정도에 한번씩 연구와 발굴의 성과를 발표할 것이다." 이번 '근대미술가의 재발견1'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근현대미술 정리 작업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절필시대' 타이틀은 윤 관장이 지었다. 당시 많은 화가들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절필할 수밖에 없었던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과 미완의 예술 세계를 주목하려는 의도다. 불행한 20세기 전반부에 살았던 6명의 작가들이 왜 붓을 꺾어야 했는지 제대로 조명한다. ‘근대미술가의 재발견’시리즈 첫 번째인 이번 전시에서는 채색화가 정찬영(1906~1988)과 백윤문(1906~1979), 월북화가 정종여(1914~1984)와 임군홍(1912~1979), 한국 현대미술의 개척자 이규상(1918~1967)과 정규(1923~1971) 등 6명의 예술세계를 조명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화가 6명은 일제강점기, 해방기, 한국전쟁 시기, 전후 복구기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에 의미 있는 작품 활동을 보여준 작가들이다. 여성 화가에 대한 편견(정찬영), 채색화에 대한 오해(백윤문),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정종여, 임군홍), 다양한 예술적 시도에 대한 이해 부족(이규상, 정규)과 같은 이유로 이들의 작품 활동이 ‘미완의 세계’로 그친 시대를 성찰한다. 전시는 ‘근대화단의 신세대 : 정찬영, 백윤문’, ‘해방 공간의 순례자 : 정종여, 임군홍’, ‘현대미술의 개척자 : 이규상, 정규’ 총 3부로 구성된다. 6명의 총 134점을 전시하는데, 정찬영의 식물세밀화, 정종여의 드로잉 등 60여 점은 최초 공개다. 또한파격적 형식의 근대 괘불 '의곡사 괘불도'(1938)도 국내 박물관 미술관 최초 전시로 선보인다.
1부에서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채색화조화와 채색인물화로 두각을 나타낸 신세대 화가 정찬영과 백윤문을 소개한다. 정찬영과 백윤문은 각각 이영일과 김은호의 제자로 ‘근대화단의 신세대’로 등장했으나 해방 후 채색화에 대한 편견이 강해지면서 화단에서 잊혀졌다. 이번 전시에는 정찬영의 유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식물세밀화와 초본 일부를 최초 공개한다. 정찬영의 남편이자 1세대 식물학자인 도봉섭과 협업한 식물세밀화는 근대 초기 식물세밀화의 제작사례이다. 백윤문은 김은호의 화풍을 계승하여 채색인물화로 두각을 나타냈고, 남성의 생활을 소재로 한 풍속화로 개성적인 화풍을 완성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대표작 '건곤일척'(1939)을 볼 수 있다.
2부에서는 월북화가 정종여와 임군홍을 소개한다. 이들은 해방 후 1940년대 화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월북 이후 남한의 미술사 연구에서 제외되었다. 정종여는 수많은 실경산수화와 풍경 스케치를 남겼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월북 전에 남긴 작품과 자료를 바탕으로 남과 북에서의 활동을 함께 조명한다. 정종여가 제작한 <진주 의곡사 괘불도>(등록문화재 제624호)도 선보인다. 6m가 넘는 괘불로 해인사에서 나와 국내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전시한다. 사찰에서 1년에 단 하루만 공개하는 그림이지만 특별히 이번 전시기간 동안 감상할 수 있다.전통 불화 양식이 아닌 파격적인 채색 화법으로 그려졌다.
임군홍은 중국 한커우와 베이징을 오가며 자유로운 화풍의 풍경화를 남겼다. 또한 그가 광고사를 운영하며 직접 그린 관광 브로슈어 도안 등의 아카이브를 통해 초기 광고디자인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 같은 시기 한국 화단에서 보기 드문 맑고 강렬한 색채로 중국의 이국적인 풍경을 표현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광고사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렸으나 ‘운수부 월력사건’(※)으로 1950년 한국전쟁 직후 행방불명됐다가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 조선미술가동맹 개성시 지부장을 맡았고 조선화가로 전향했다. 이번 전시 표지작이 된 임군홍의 '가족'은 1950년 월북하기전에서 그린 미완성 작품이다. 작은 아들을 안고 있는 부인과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큰 딸을 그렸다. 부인의 뱃속에는 곧 태어날 작은 딸이 있었다. 왼쪽에 그려진 백합은 임군홍의 집 마당에 피어있던 백합을 그린 것인데, 곧 태어날 아기의 탄생을 알리는 듯하다. 백합이 활짝 핀 것으로 보아 6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테이블 위 도자기들은 임군홍이 수집한 것으로 임군홍이 떠난 후 이것을 팔아 가족이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현재는 위스키 병만 남아 유족에게 전하고 있다. 이 그림속에 있는 실제 위스키병도 전시됐다.
3부에서는 한국 현대미술의 개척자라 불리는 이규상과 정규를 소개한다. 이들은 ‘모던아트협회’,‘현대작가초대미술전’등에 참여하며 해방 후 현대미술 화단 선두에서 활동했으나 이른 나이에 병으로 타계하고(이규상 50세, 정규 49세) 작품이 적어 제대로 연구되지 못했다. 이규상은 1948년 김환기, 유영국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미술 단체인 ‘신사실파’를 결성하며 한국 현대 추상회화의 1세대로 활동했으나 남아 있는 작품이 10여 점에 불과하고 알려진 행적이 없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이규상과 관련된 아카이브와 제자, 동료 등과 인터뷰한 자료를 한 자리에 모아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정규는 서양화가로 출발해 판화가, 장정가(裝幀家), 비평가, 도예가로 활동 영역을 확장했으나 그에 대한 평가는 회화와 비평에 국한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정규의 작품세계가 ‘전통의 현대화’, ‘미술의 산업화’로 변해가는 과정을 추적했으며 특히 후기에 가장 몰두했던 세라믹 벽화를 소개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근대미술 연구와 전시로 특화된 덕수궁관의 역할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추진 중인 한국미술사 통사 정립 사업에도 일익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이번에 소개되는 6명 작가는 근대미술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대표작을 제외하면 생애조차 희미할 정도로 잊혀버린 화가들에 대한 기억들을 한자리에 모았다"며 "한국 현대미술 초창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방의 모더니스트들에 대하 발굴과 조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흩어지기 직전에 모인 기억들을 토대로 근대 화단의 변두리와 경계에 위치했던 여섯 화가들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으면 한다"고 바랐다. 6명의 작가 전시실마다 작품과 맞춘 전시장으로 꾸며 눈길을 끈다. 지난 4개월간 리모델링을 통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은근하게 새로워졌다. 한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근대미술 특화된 전시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98년 개관이래 '다시 찾은 근대미술전(1998), '한국근대미술: 근대를 보는 눈'전(1999)을 시작으로 '鄕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2012)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2015) '변월룡(1916~1990)'(2016) 등 한국 근대작가와 작품 소개에 주력하고 있다. 전시는 9월15일까지.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