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현대미술 주술사' 양혜규 "접혀진 시간을 폈다"
독일-서울서 활동...세계적인 설치작가로 부상2015년 삼성미술관 리움 이후 4년만의 개인전국제갤러리서 첫 전시 '서기 2000년이 오면' 3일 개막민해경 82년 노래 유행가+도보다리 회담 새소리 병치융합
【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20세기 유럽 미술계 최대의 문제적 비평가 ‘마테오 마랑고니’는 '회화는 오직 지성만이 감지할 수 있다'고 했다. 미술 대중화 시대에 '어이가 없네~'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유명 작품일수록 해석과 해독이 쉽지 않다. 언어 번역기가 등장한 21세기 최첨단 시대지만 현대미술은 점점 더 '현대인도 못 알아 먹는' 태세다. ‘미술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고대부터 여전히 풀리지 않는 난제다. '명화는 아무에게나 말을 걸지 않는다'며 그들만의 리그를 굳건히 하고 있다. 세계적인 설치미술가로 부상한 양혜규(48·독일 슈테텔슐레 교수)의 작품이 그렇다. 처음부터 쉽게 문이 열리지 않는다. 2015년 삼성미술관 리움 전시이후 4년만에 다시 온 그녀의 작품은 더욱 더 혼란스럽다. 국제갤러리에서 처음 펼치는 개인전이 3일 개막한다. 전시 제목은 '서기 2000년이 오면'으로 전시장은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혼돈의 무대다. 현실과 상상이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5m 높이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운 '월페이퍼'에는 마늘, 고추, 짚풀, 불, 소나무, 로봇수술기계 그림들이 하나로 엮어져 전시장을 점령했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방울, 흰색의 대형 블라인드 설치물과 회색의 짐볼이 지구 행성처럼 놓여진 전시장은 희뿌연 연기가 안개처럼 깔려 압도적인 분위기에 신비함을 고조시킨다.
2일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만난 양혜규는 주술사 같았다. 길게 푼 머리,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의 반은 붉은 색으로 페인팅을 했다. 마치 붉은 마스크를 쓴 것 같은 모습인데, 옆에서 보면 하트 모양으로 보인다. 페이스 페인팅은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라는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이 말이 입에서 나오자 세상 무서울 것 없을 것 같은 전사 같은 외모 뒤의 양혜규의 내면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고민 한 것은 '솔직함'이다. 기대에 부응하기 보다 솔직하려고 했다"는 그는 "이번 전시는 양혜규라는 작가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리얼리티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양혜규의 1977년부터 과거부터 2000년대, 현재의 시간이 녹아 있는 이번 전시는 가수 민해경이 1982년에 발표한 노래 '서기 2000년'에서 비롯됐다. 그때는 미래였지만, 지금은 과거인, 그러면서 여전히 미래인 그 노래는 경쾌한 후렴구가 강렬하다. '사바 사바 사바 우리는 행복해~다가오는 서기 2000년을, 모든 꿈이 이뤄지는 해~ 사바 사바 사바 우리는 기다려~' "전시에 들어오기전에 그 노래(유행가)를 들으시고, 전시장에 들어 오시라. 그러면 오른쪽에 제가 동생들과 1977년에 그린 '보물선' 그림이 붙어있다. 시조새와 도깨비들도 등장한다. 그때 어린애가 그린 그림속 시간과 지금의 공간이 섞여 전시를 이끈다” 양혜규는 "기존의 전시에 쓰지 않았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유행가도, 어린시절에 그린 그림을 가져온 것도 처음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2015년 짚풀 작업을 처음 했을때도 지속적인 조각의 군이 될지 일시적인 프로젝트성 작업이 될지 몰랐다. 이런 작품을 계속 할지는 살아봐야 할 것 같다. 하하" 작업은 계속 변화되고 있다. 하나에 집착하지 않고 '집적'거리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2011년 '축지법'을 타이틀로 한 전시를 하면서 축지법이라는게 공간 이동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전환'이라고 깨달았다. "가짜일수 있는 논리적인 세계를 진짜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래서 쉽게 조합할 수 없는 투샷, 이형조합에 관심이 많다" 지역적 경계를 넘어 과거와 현재, 기술과 문화, 자연과 문명이 융합된 벽지 작업 '배양과 소진'은 문화와 민속에 대한 기존 분류법에 반하는 양혜규의 경계없는 순환적 고리가 이어지는 융복합 시선이 담겼다. 초록의 소나무들이 구렁이처럼 넘나들며 환각처럼 이어지는 벽지 작업과, 수많은 방울이 모여 거대한 방울로 움직이는 전시장은 그나마 '새 소리'가 반갑게 들린다. 무엇인가 알아들을 수 있다는 '기쁨의 소리'이기도 하다. '새 소리'는 양혜규가 병치한 시공간을 우리도 열어볼 수 있는 흔적이자 기록이다. 그 소리는 일명 '도보다리 회담'의 장면으로 우리를 이동시킨다. 그때, 양혜규는 7시간 늦게 독일에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생중계를 보며 작업실도 안가고 시공간에 빠져들었다. 새 소리만 들리던 그 시간, 21분 정도 분량이었다. 양혜규는 "그 장면을 어떤 매체에 따르면 달 착륙 이후 세계가 실시간으로 봤던 중계방송이라고 하더라"며 "그때 그 장면에 압도됐었다"고 했다. "도보다리에서의 장면, 일종의 림보, 천국과 지옥 사이 중간에 있는 연옥 같은 느낌이었다" 양혜규는 "5000명 가까운 외신기자들이 세계 방방곡곡에 쏘아됐던 중계방송을 시청했지만, 그때 나는 카메라가 보는 시간을 살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새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정적, 굉장히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인데, 그것을 뛰어넘는 국면이 자극적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이번 전시 작품에 들어온 '새 소리'는 시작도 끝도 알 수없는 시공간속 이미지속에서 '현실 세계'임을 증명한다. 작가의 설명을 들어보면 작품의 길 눈이 터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작품의 문은 쉽게 열리려 하지 않는다. 현대미술은 난해함이 대세이지만, 일부러 어렵게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대체 무슨 작품?, 무슨 의미?' '이런 작품을 왜 하는 거야?'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는 양혜규는 왜 이런 작품을 하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살고 싶어서 한다"고 아리송한 답을 했다. "'미술 골수'로서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양혜규는 전시를 하기까지 한권의 책 만큼 연구하고 공부하는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미네아폴리스 워커아트센터, 런던 테이트 모던, 파리 퐁피두센터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1년생, 1990년대까지 서울에서 살다, 독일로 건너갔다. 1994년 독일로 이주 후 프랑크푸르트 국립미술학교 슈테델슐레(Städelschule)에서 마이스터슐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모교인 슈테텔슐레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8년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독일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볼프강 한 미술상을 수상, 이어 10월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수여하는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 표창)’ 미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전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한국 작가' 양혜규로 이름을 알렸다. 사우스 런던 갤러리(2019), 몽펠리에 라 파나세 현대예술센터(2018),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2018), 베를린 킨들 현대미술센터(2017), 파리 퐁피두센터(2016), 베이징 울렌스 현대미술센터(2015), 서울 삼성미술관 리움(2015),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근현대미술관(2013), 독일 하우스 데어 쿤스트 뮌헨(2012), 미국 아스펜 미술관(2011)과 워커 아트 센터(2009) 에서 전시했다. 특히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단독으로 전시한 양혜규는 시드니 비엔날레와 리버풀 비엔날레(2018), 제12회 샤르자 비엔날레(2015), 타이베이 비엔날레(2014), 제13회 카셀 도쿠멘타(2012), 광주비엔날레(2010)와 같은 대형 국제전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다. 세계에서 전시 러브콜이 이어진다. 오는 10월 21일 열리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 재개관전(현대카드 후원)과, 11월 2일 마이애미 배스미술관에서 개인전 '불확실성의 원뿔 In the Cone of Uncertainty'이 이어진다. 오는 2020년 여름 영국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 분관에서 예정된 개인전 등 양혜규의 활동은 북미와 유럽을 아우르며 폭넓게 진행될 예정이다.
SF나 심령 영화처럼 이미지가 펼쳐지는 전시장에서 양혜규가 말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90년대 초까지 산 한국은 생생한 시간이다. 90년대 중반부터는 전후가 다른 시공간을 산 것 같다. 독일로 가면서 제 3세계로 온 것 같았다. 그때는 어린 20대였는데 독일 할머니 전후 세대가 가진 멘탈을 가졌다고 느꼈다"고 했다. 메트릭스 같은 세상. "굉장히 평범할 수 있는 유행가 안에서 접혀진 시간들을 봤다"는 양혜규의 이번 전시는 '시간은 연속적인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2차원의 이미지를 보며 3차원 4차원의 시공간으로 갈 수 있는 건 축지법이 아니라 '생각의 전환'이다. 과거로 접어놨던 시간을 납작하고, 입체적으로 펴낸 이번 작업은 우리가 경험한 것들을 환각처럼 일깨우는 장치다. 뒤죽박죽한 이미지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뒤척이게 하며 촉수를 세우게 한다. 그런면에서 양혜규는 영악한 현대미술 주술사다. 전시는 11월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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