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월담] 이육사의 딸, 옥비를 말하다
육사 자취 찾아가는 연해주 3박4일 동행 대담"젊었을 땐 시인의 딸이라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아버지 죽인 일본에서 6년 칩거육사가 연해주에 왔을 것이라고 확신
【서울=뉴시스】정철훈 문화부장 = 시인은 어린 딸을 남기고 떠났다. 시인은 40세에 작고했지만 딸은 아버지가 산 나이보다 2배 가까운 78세를 살고 있다. 그 이름 옥비(沃非). 윤택하게 살지 말라는 뜻의 '옥비(沃非)'는 백 일 잔치 때 대소간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이다. 2019년 10월 19일 오전 6시 김해공항 대합실에서 만난 옥비 여사는 단아한 체구에 인자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눈망울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품새에서 예사롭지 않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는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겹친 2019년 가장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거의 매달 서울은 물론 각 지방의 문학행사에 초대되는가 하면 해외 초청도 끊이지 않는다. 이날도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열리는 제9회 해외이육사문학제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3시 안동 자택을 출발, 김해공항에 도착한 직후였다. 해외이육사문학제는 경술국치 1년 후인 1911년 석주 이상룡, 백산 김대락 등 안동 지역 선비들이 만주로 건너간 '도만(渡滿) 100주년'을 기념해 2011년 연변 조선족 작가들과 함께 출범해 1~5회 때는 중국 연변에서, 6~7회 때 칭다오와 상하이에서 각각 열렸으나 2017년 사드(THAAD) 사태로 중국정부에서 한국문화행사를 불허하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지난해 8회 때부터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열리게 되었다. 다시 옥비 여사로 돌아오면 1941년 생, 78세라는 나이에도 불구, 20여 명의 일행 가운데 가장 초롱초롱한 눈매의 소유자인 것은 그가 민족저항시인 이육사(1904~1944)의 무남독녀 외동딸이라는 선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중 속에 섞여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외롭게 핀 들꽃처럼 혼자만의 고독에 잠긴 모습이 얼핏 스쳐갔던 것이다. 언젠가 그런 꽃을 국경에서 본 적이 있었다. 오랑캐꽃이었던가.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졸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이용악, '오랑캐꽃' 전문) 오랑캐꽃을 연상하며 출국수속을 밟기 위해 길게 줄을 선 그에게 다가갔을 때, 나는 옥비 여사와 3박4일 간의 긴 인터뷰를 예감했다. 나는 블라디보스톡-우수리스크-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어지는 행사 중간 중간에 옥비 여사 곁에 앉아 많은 질문을 던졌고 많은 대답을 들었다. 육체성, 그건 하나의 사건이 아닌가. 민족저항시인의 으뜸인 육사의 딸이 지금 눈앞에서 육성을 통해 옛 일들을 회억하고 있으니 그건 육사의 육성과 버금가는 육체성을 획득한 증언일 터다. 그의 증언이 심장을 뚫고 나온 진실성을 담보하고 있음을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예컨대 지난 5월 서울 종암동 주민 센터에서 열린 '이육사 문화제'에 참석한 옥비 여사의 대담이 그것이다.
슬픈 이야기가 끝나면 기쁜 이야기가 시작되는가. 아니, 옥비 여사는 그 대담에서 "아버지가 지사적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사를 도맡았던 어머니 덕분"이라고 힘을 주었다. 어머니 안일양의 고향은 영천 화북 오동이다. 육사의 장인 안용락은 안 씨 집안에서도 가장 부유했고 그래서 똑똑한 사위를 얻을 수 있었다. 육사가 만 16세 되던 1920년 봄이었다. "어머니 안일양은 삯바느질부터 건어물상, 하숙집 등 다양한 일들을 하며 꿋꿋하게 가정을 꾸려나갔으며, 덕분에 아버지 이육사가 독립운동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했는데, 제가 아주 어린 시절엔 이육사의 딸이라는 것을 밝히길 꺼렸던 적도 있어요." 이런 증언이 출국심사대에 길게 줄을 선 옥비 여사에게서 나왔으니 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슬그머니 뒤에 다가가 물었다. 발은 아직 김해공항을 딛고 있었지만 질문은 이미 나로부터 이륙했던 것이다. △육사(본명 원록)는 6형제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기에 선생님에겐 다섯 명의 삼촌들이 있지요. 그들은 누구신지요. 옥비 여사도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다보며 대답했다. ▲한학을 공부하여 가문에서 만든 신학문 학원에서 일한 큰아버지 원기, 서화가로 유명한 원일, 문학평론을 하며 조선일보 학예부를 담당한 원조,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를 지낸 원창, 미술에 소질이 있어 전국미술대회에서 입선했으나 19세로 요절한 원홍이 그들이지요. 특히 문학평론가 이원조는 1944년 육사의 사망 이후 그의 시편을 모아 1946년 <육사시집>을 펴냈어요. '청포도'와 '광야' 등 많은 시를 발표한 아버지였지만, 정작 시집은 아버지 사후에 발간됐지요. 그런데 넷째 삼촌 이원조는 덕혜옹주의 6촌 동생과 결혼했어요. 그래서 제 어머니가 그 집에서 궁중요리를 배우기도 했지요. 나도 덕분에 어려서부터 대구를 손질하는 법 등을 배워 ‘옥비당’이라는 이름의 폐백음식 가게를 연 적도 있어요. 하지만 원일, 원조, 원창 등 세 삼촌은 해방 이후 1947년 좌우대립 당시 월북을 했기 때문에 삼촌들의 사망 날짜도 정확히 알지 못해 제사도 기일이 아닌 생일에 지내고 있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25 전까지 원일·원조·원창 삼촌들이 한 달에 세 번은 우리 집에 오셨어요. 우리 어머니(안일양)를 위로하려고요. 삼촌들이 어머니께 술·담배를 다 가르치셨어요. '형수가 아니라 누나'라면서…. 삼촌 주량이 꽤 쌨는데도 나중에는 어머니가 대작할 정도가 되셨어요. 오시면 정치 얘기도 하고, 나라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어머니도 그런 사상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나 봐요.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형제간 우애가 워낙 좋았으니 사상을 공유했을 겁니다. 원일·원조·원창 삼형제는 아버지의 유작을 모으기도 했는데 제 기억 속 삼촌들은 올 때마다 서류가방을 불룩하게 채워서 갔어요. 우리 삼촌들이 다 신문사에 계셔서 그런데 밝잖아요. 다 글에 능했으니까. 그때 넷째 삼촌이 대표를 했지요. 이원조는 1945년 12월 17일, 육사의 시 '광야'와 '꽃'을 <자유신문>에 처음으로 발표했다. 당시 원조가 덧붙인 두 문장에는 함께 조선독립을 꿈꾸다 옥사한 형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가형이 41세를 일기로 북경옥사에서 영면하니 이 두 편의 시는 미발표의 유고가 되고 말엇다. 이 시의 공졸은 내가 말할 바가 아니고 내 혼자 남모르는 지관극통을 품을 따름이다." 삼형제는 육사의 시를 모아 1946년 9월 '육사시집'을 발간했다. '광야', '꽃'을 포함해 '청포도', '절정' 등 모두 20편의 시가 담겼다. 원조는 시집의 발문을 썼다. "과연 '천년 뒤 백마탄 초인이 있어' 그의 노래를 목 놓아 부를 때가 있을넌지 없을넌지 모르겠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입니까. 장소는 어디였나요. ▲청량리역이었어요. 아버지는 1943년 7월 할머니와 맏형(원기) 1년 상인 소상(小喪)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안동 풍산에게 1박을 하고 상경했는데, 그해 늦여름에 동대문경찰서 형사대와 헌병대에 의해 검거되었어요. 그리고 20일 넘게 구금생활을 하다가 북경으로 끌려가셨지요. 그때 어머니는 당시 수유리에 살던 아버지의 제종숙(7촌 아저씨) 이규호 어른에게 저를 맡기고 옥바라지를 하셨어요. 아버지가 북경으로 이송될 당시 이규호 어른이 '육사가 이번에 가면 마지막이 되겠다. 부녀지간에 만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저를 기차역으로 데리고 가셨지요. 그때 아버지는 포승줄에 꽁꽁 매여 있었고 용수를 쓰고 있었어요. 세 살 딸 입장에서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지요. 그 장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제게 무슨 말을 하셨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버지에 관한 최초의 기억은. ▲그러니까 그 무렵인 세 살 때 기억이지요. 아버지가 선물을 주셨는데 벨벳 투피스와 챙이 있는 핑크색 모자와 까만 끈이 있는 구두였지요. △그때는 어디 사셨나요. ▲서울 명륜동, 현재 성균관대학 근처 혜화동 5거리에서 살았어요. △아버지가 왜 고향인 안동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셨는지요. ▲제 증조부 치헌 이중직은 진성 이씨 문중학교인 근대학교 보문의숙 설립에 관여하신 분인데 집안에서 부리던 종들을 한일강제병탄에 분개해 다 풀어주고 재산도 나눠준 뒤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지요. 그때 여자 식구들은 안동 녹전면 신평리로 잠시 이사를 했다가 1920년 일가 모두가 대구 남산동 일대로 이주했어요. 아버지는 고향인 안동 원촌에서 혼인을 하고 바로 그해에 대구로 이사했지요, 그 후 1939년 서울 성북구 종암동 62번지로 일가가 모두 이사를 왔어요. △1939년은 육사가 시 '청포도'를 발표하던 시기가 아닌지요. ▲맞아요. "내 고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육사, '청포도' 전문) 당시 육사는 일본 헌병에 쫓기어 포항(영일)으로 피신했는데 친구가 포항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운영하는 포도밭에 인부로 일하면 더 안전할 수 있다는 친구의 충고를 받아들여 육사는 포도밭에서 한 동안 일을 했다. 일제가 경영하는 오천(烏川)포도원이 그곳. 12만 평의 대지에 청포도가 주렁주렁 열리는 그곳은 마쯔다(三輪) 상표를 붙인 아시아 최고품질의 와인이 생산되기도 했다. 한때 종사자가 250명에 달했으나 해방 후 관리부족과 기술 부족으로 생산이 중단되었다. '청포도'는 1939년 8월 <문장>지에 발표된 작품이다. 육사는 생전에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1943년 7월 몸을 추스르려고 경주 남산의 옥룡암에 들렀을 때 먼저 와 요양하고 있는 이석우에게 털어놓은 말이 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 이제 곧 일본도 끝장난다." 육사는 1943년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고 있었다. '청포도'를 발표할 당시 육사는 술을 엄청나게 마셔서 신석초 시인으로부터 '대호주(大酒豪)'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 "그 무렵 동대문 안에는 우리의 단골술집인 찹쌀 막걸리집이 있었다. 하얀 밥알이 동동 뜨는 막걸리다. 이것을 우리는 동동(動動)이라 불렀었다. 물론 고려가사 ‘동동’에서 나온 이름이다. 어느 날 꼭두새벽에 그곳에서 해장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곱빼기로 연거푸 아홉 사발을 마시고도 끄덕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듯 주량이 컸었다. 그러나 취하지 않는 주호였다."(신석초의 회고) 신석초가 이육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35년 봄이다.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 있는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고가(古家)를 드나들 무렵이다. 정인보의 서재에는 묵은 한적(한문으로 쓴 책, 漢籍)이 꽉 들어차 있어서, 사람이 자리를 잡으면 책 속에 들어앉은 꼴이 된다. 정인보는 갸름하고 가무스름한 얼굴에 엷은 웃음을 띠고 서재에서 내방객들을 맞는다. "문장은 고금에 맹자(孟子)를 덮어 먹을 게 없단 말이야." 하고 말문을 연 정인보는 맹자의 문장론과 사상론을 거쳐 보학(譜學)으로 넘어간다. 신석초는 동양 고전을 두루 꿰는 정인보의 해박함과 재미나는 말솜씨에 반해 앎의 법열(法悅)로 가슴이 벅차오르곤 한다. 바로 그 서재에서 신석초는 육사를 소개받은 것이다. 티끌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둥근 얼굴, 상냥하고 관대하며 친밀감을 주는 눈과 조용한 말씨, 반듯한 매무새, 여기에 영남의 유학(儒學)으로 정신을 단련한 선비적 품격까지 갖춘 육사에게 신석초는 첫 대면부터 호감을 느낀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단짝처럼 어울려 다닌다. 한학과 중국 문학이 갖춘 격조와 규범에 영향을 받은 육사의 습작시를 읽으며 둘은 서로 감상을 나눈다. 육사가 루쉰과 궈모뤄(郭沫若)의 문학에 대해 얘기하면, 신석초는 자신이 빠져 있는 발레리의 시에 대해 얘기한다. 두 사람은 경영난에 허덕이며 사주 혼자 청탁과 편집, 경리까지 도맡아 하던 <신조선사>의 사무실에 나가 월간지 <신조선>의 편집일을 무보수로 돕기도 한다. 육사의 초기 대표작인 '황혼'은 이 잡지에 실린다. <신조선사>는 정인보가 관여하고 있던 정약용 문집 '여유당 전서'의 간행을 맡은 곳이기도 하다.(장석주, '나는 문학이다', 이육사) △여사님은 어디서 출생하셨나요. ▲일가 모두 서울 종암동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서울 문화촌으로 처음 분가했지요 그 다음에 다시 서울 명륜동에 자리를 잡으셨지요. 저는 1941년 명륜동에서 태어났지요. 그 전에 아버지가 대구 남산동에 살 때 제 위로 오빠가 있었는데 두 살떄 홍역으로 사망했고 문화촌에 살 때 언니가 태어났는데 또한 6개월밖에 살지 못하고 홍역으로 사망했지요. 어머니가 생전에 항용 말씀하시곤 하셨지요. 구파발 너머 문화촌의 아홉 개 단독 주택 가운데 여덟 번째 집에서 네 언니가 태어났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언니는 너무 어려 사망해서 호적엔 없어요. △아버지 냄새를 기억하십니까. ▲냄새라기보다 아버지는 아이보리색 양복도 입으시고 넥타이도 매셨고,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토종 달걀색 양복을 입으셨어요. 그게 조풍연 선생과 아버지가 같이 찍은 사진이 1968년 <여성조선> 기사에 실려서 확인이 되었지요. 제 기억이 맞은 것이죠. △혹시 아버지와 닮은 데가 있다는 말을 듣지 않나요. 어디가 닮았다고? ▲친척어른들이 눈, 이마가 닮았다고들 하시더군요. 아버지는 이마 위에 앞 가마가 있어서 머리털을 가끔 손으로 뽑으셨다는데 저도 앞 가마가 있어요. △그런 앞 가마를 보고 소가 핥았다고들 하지요. ▲맞아요, 안동에도 그런 말이 있어요. 소가 핥은 머리라고. 제 앞이마가 살짝 튀어 나온 것까지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닮았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 어머니를 닮아가더군요. △아버지의 유해는 어떻게 고국으로 돌아왔는지요. ▲1944년 한 집안 분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이병희 여사가 시신을 수습해 오셨어요. 이병희 여사도 아버지와 함께 북경 일본영사관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먼저 가석방이 되었지요. 가석방 사흘 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하시더군요. 감옥에서 가까운 곳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연락이 닿는 간수장이 와서 육사 사망 사실을 알려 주었다고 들었어요. 해질 무렵, 일본영사관감옥에 혼자 가서 시신을 수습했는데 아버지는 눈을 못 감은 채 숨을 거둔 상태였지요. 그런데 화장 비용이 모자라 간수장을 협박해 돈을 받아내서 화장을 한 후 유골함을 맡길 곳이 없어서 북경에 살고 있는 임화의 본부인 이귀례 씨 댁에 맡겨놓았지요. 당시 이귀례 여사는 해산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인데 임화의 아이를 낳았던 것이죠. 그 집에 원창 삼촌이 북경에 도착할 때까지 맡겨놨다고 하더군요. 건넛방 문갑 위에 모셔놨다고 했지요. 원창 삼촌이 급보를 받고 5일 만에 북경에 도착, 유해를 모셔왔지요. △그럼 유해는 어디에 모셨나요. ▲서울시 성북구 종암동에 장례식장을 마련했는데 장례식엔 친구 분들이 몇 명 오시지 않았어요. 어머니 말에 따르면 조규인이란 친구가 다녀갔다고 하더군요. 조규인은 부잣집 아들인데 아마도 아버지에게 군자금을 대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 △그 다음에 미아리공동묘지에 모셨지요. 왜 그쪽으로 모셨나요. ▲집에서 가까워서였지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종암동 살 때 지나가던 스님이 들어와서 이 집에 동티가 나겠다고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할머니, 어머니는 매우 불안해했지요.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세 분 모두 1~2년 사이에 돌아가셨어요. 원일, 원조 삼촌은 북으로 올라가셨다가 1.4후퇴 때 다시 서울로 내려왔으나 또 다시 북으로 올라갔지요. 그러니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후, 미아리공동묘지에 있는 할아버지 무덤을 위시해 아버지 무덤도 돌볼 사람이 없을 거 같아 어머니가 종조부와 의논해 고향인 안동 원촌으로 이장을 했어요. 그게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의 일이지요. △이장할 때 기억이 나십니까. ▲상주라서 소복 입고 갔었어요. 할아버지는 두개골이 땅 밑으로 흘러가서 없었는데 2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겨우 찾았지요. 할머니는 좋은 자리였으나 모두 이장을 했어요. 예전 스님 얘기가 증명된 셈이죠. 원일, 원조 삼촌은 북에서 1950년대 북에서 숙청되었고 원창 삼촌은 1951년 해주 근처에서 폭격 맞아 사망했지요. 원창 삼촌은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이면서 조봉암 비서를 한 분입니다. 원록, 원조 삼촌도 모두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지요. 위당 정인보가 조선 3재(三才)에 양주동, 이원조, 유진오 세 사람을 꼽을 정도로 원조 삼촌은 당대에 뛰어난 인재였지요. 만약 아버지가 해방 후까지 살아계셨다면 혹시나 북으로 가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럼 친미파들이 못마땅해 했을 거예요. 아버지가 체포된 직후 여운형 선생은 할머니 소상 때 제문을 써서 가져오셨는데 그 제문을 보관하던 중 일경이 들이닥쳐 가택 수색을 하는 통에 어머니가 아궁이에다 제문을 숨긴다고 급히 던졌는데 남은 불씨가 옮겨 붙어 타버리고 말았지요. 나중에 옥에 갇힌 아버지를 면회하면서 그 말씀을 드리니까 차라리 잘했다고 말하셨다고 합니다. 여운형 선생도 일경의 감시 대상이었으니까.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영천 오동 부잣집에서 시집 오셨지요. 명륜동에 살 때 함경도 학생들 하숙도 치고 생활력이 매우 강하셨어요. 어머니의 직업은 11가지나 됐어요. 건어물, 하숙, 삯바느질, 냉면 장사, 군수품 취급, 미곡상, 외삼촌들이 금광 할 때는 금광 총무 등등. 어머니는 자존심이 세고 생활력이 강한 분이었어요. 처음으로 아버지가 시 원고료를 받아 건넨 돈으로 쌀과 연탄을 샀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돈도 갖다 줄지 알고 참 별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버지는 생활비를 가져다주신 적이 없어요. 모든 생활을 어머니가 책임지셨어요. 어머니는 체구는 작아도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었죠. △여사님은 언제 결혼하셨나요. ▲1964년, 공무원 하다가 건설회사에 근무하던 양씨 성의 남자와 했지요. 제 슬하에 아들만 둘인데 남편과는 1999년에 사별했지요. △육사에겐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보다 한 살 작은 사촌동생 동박이 양자로 들어왔어요. 다섯 째 원창 삼촌의 셋째 아들인데 아버지 사후에 양자로 정해졌지요. 세 살 때 어린 기억이지만 어머니가 비녀 풀고 울던 모습, 양자를 정해놓고 원창 삼촌이 유해 모시러 북경에 간 상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왜 동박을 양자로 들렸냐 하면 아버지가 생전에 원창 삼촌의 셋째 아들 동박을 예뻐하셨기에 그리 된 겁니다. △여사님은 언제 안동에 정착했나요. ▲양자가 있으니 제가 친 딸이라도 아버지 일에 관여하지 않았어요. 저는 자유를 원했지요. 사실 나는 아버지 딸이란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초등학생 때나 중고교 때 선생님들이 모두 제가 육사 딸이란 걸 알았어요. 그래서 부담스러워서 글을 안 썼어요. 남들이 주목하지 않았으면 글을 썼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느 학교를 다니셨나요. ▲대구 수창국민학교에 입학했다가 2학년 때 삼덕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아버지 친구분이 동인국민학교 교장이어서 그쪽으로 전학했지요. 그 다음엔 제일여중, 대구여고를 졸업했고요. 여고를 졸업한 해 어머니가 바느질이며 집안 살림을 가르친다고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지요. 혼담이 있으면 일찍 결혼하는 게 좋다면서요. 하지만 저는 그 이듬해인 22세 때 경북여대 국문과 입학했지요. 어머니의 고집을 제가 꺾은 것이죠. 경북여대는 2년제였는데, 김춘수 시인이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지요. △안동에는 언제 정착하셨나요. ▲1999년 남편과 사별했을 때 제가 한국나이로 59세였어요. 일주일 만에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연고가 전혀 없는 일본 니카타 총영사관 관저에서 6년간 살았습니다. 어머니 영향으로 제가 궁중요리도 했고 꽃꽂이도 여러 해 했기 때문에 총영사관 관저에서 코디네이터로 근무를 했지요. 니카타 총영사의 부인이 제 친구였는데, 그쪽에 말을 해서 덜컥 혼자 건너갔지요. 그런데 2005년 한 언론사에서 육사의 딸을 찾는다며 일본주재 한국대사관이며 총영사관에 연락을 취하고 법석을 떠는 바람에 제 위치가 알려지게 되었지요. 그때 총영사도 내 친구도 왜 육사의 딸이란 말을 하지 않았느냐며 섭섭해 했지요. 나는 육사의 딸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인데, 일이 그렇게 되고 말았지요. 치아 치료차 2006년에 한국 들어왔다가 안동에서 열린 이육사문학관 행사에 참석했지만 저는 크리스천이어서 묘소에 가서도 절을 하지 않았지요. 그러다 이듬해인 2007년 7월 이육사문학관 행사 때 다시 참석했다가 운영위원회 측의 요청으로 문학관 일어 통역원으로 근무를 시작했고 다시 이듬해 이육사추모사업회가 이육사문학관을 민간위탁으로 운영하면서 정식 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어디에서 사시는지요.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있는 전통 가옥 목재고택에 살고 있어요. 조선 후기 문신인 이만유(李晩由)가 살던 집인데 그가 영해부사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영감댁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목재 이만유는 퇴계의 11세 손이지요. 그리고 그의 딸이 바로 "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떠난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의 며느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난 서간도에서 맞이한 석주의 손주 며느리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의 저자 허은 여사이지요. 허은은 허형의 손녀인데 허형이 바로 육사의 외할아버지입니다. 그런 연고가 있어 제가 목재 고택을 지키고 살고 있지요. 목재고택 바로 옆이 아버지 육사선생의 집터입니다. △아버지가 러시아 연해주와 어떤 연고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딱히 연해주에 왔었다는 물증은 남아있지 않아요. 다만 어머니께 들은 얘긴데, 한 번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러시아 루블화 두 장을 쥐어주면서 “잘 보관하고 있으면 나중에 요긴하게 쓸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루블화 가운데 가장 단위가 큰 화폐였을 것인데, 어머니는 아버지 말대로 이 돈을 보관하던 중 가택수사로 들이닥친 일본인 형사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지요. 사실 아버지의 중국에서의 거점은 북경, 남경, 상하이 등지였어요. 북만주 쪽에서 연해주로 들어가는 육로가 있긴 있을 터인데, 아직까지는 연해주에서의 행적은 드러나지 않고 있지요.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느낀 것이지만, 아버지도 틀림없이 연해주에 왔을 것이고 이주한인들이 모여 살던 신한촌에도 들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는 느낄 수 있어요. 아버지가 연해주 땅을 밟았을 거라는 것을. 김해공항에서의 예감이 맞아떨어진 것일까. 인터뷰는 지난 10월 19~22일 3박4일에 걸쳐 마라톤식으로 진행됐다. 첫날은 제9회 해외이육사문학제가 열린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유노스티회관, 숙소인 우수리스크호텔, 그리고 호텔 근처 카페 '스카스카'에서 자정 무렵까지. 둘째 날은 블라디보스톡 숙소인 아반카 호텔, 혁명광장, 전쟁용사기념탑 앞, 그리고 금각만이 내다보이는 독수리 전망대와 조명희문학비 앞에서. 셋째 날은 식당이며 휴게소며 기념품 가게에서. 넷째 날은 버스 안과 공항 대합실에서. 22일 오후 4시 경 김해공항에 내려 수화물을 찾는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옥비 여사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는 손을 흔들어 가볍게 인사를 했고 웅숭깊은 눈매는 지난 3박4일 동안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여정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