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대로]크리스마스에 1만4000명 생명 선물한 '산타 선장'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 6·25 때 흥남 부두로美 레너드 라루 선장, 1만4000여 북한 주민 구조피란민들 태워달라는 미군 요청에 기적의 항해참전 후 수도원서 종교인의 삶 살다 2001년 별세기네스북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 구출해"
※ '군사대로'는 우리 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하는 연재 코너입니다. 박대로 기자를 비롯한 뉴시스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군의 이모저모를 매주 1회 이상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선장(船長)은 갑판부는 물론 선박 전체를 지휘·통솔하고 선내 질서를 유지하며 선박을 안전하게 운항시키는 총지휘 책임자다. 현행 선원법을 보면 선장은 선박에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 인명·선박·화물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 해야 한다. 또 선장은 인명구조 조치를 다 하기 전에 선박을 떠나서는 안 된다. 선장은 다른 선박 또는 항공기의 조난을 알았을 때는 인명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 해야 한다. 세월호 선장 이준석씨는 선장에게 주어진 이 같은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이씨는 세월호가 침몰한 2014년 4월16일 당시 승객 300여명을 내버려 두고 배에서 탈출했다. 법원은 사고 당시 이씨가 승객의 퇴선 명령 등 필요한 구호조치를 하지 않고 먼저 빠져나가 선장의 역할을 의식적·전면적으로 포기했다면서 승객을 적극적으로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판시했다. 이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정반대 경우도 있다. 어떤 선장은 자기 배 승객뿐만 아니라 배 밖에 있던 피란민들의 목숨까지 구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무려 1만4000여명을 사지에서 끌어냈다. 미국인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는 7600t짜리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Meredith Victory)의 선장이었다. 그는 6·25전쟁 당시 미군 군수물자 수송 명령에 따라 함경남도 흥남 부두로 향했다.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의 저서 '생명의 항해'에 따르면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지만 중공군의 개입과 매서운 추위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흥남에서 배편으로 철수하는 작전을 짰다.
라루 선장과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기뢰가 다수 부설된 위험한 해역을 뚫고 흥남 외항에 도착한 것은 1950년 12월20일이었다. 중공군에 함락되기 직전이었던 흥남항은 유엔군 외에 중공군을 피해 도망쳐온 피란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 선상에서 쌍안경으로 해안가를 관찰하던 라루 선장은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흥남 시가로 포탄이 쏟아지는 와중에 북한 주민들은 바닷가로 떼 지어 몰려들고 있었다. 부둣가는 온통 사람 천지라 마치 부두가 검게 칠해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던 12월22일, 미 육군 10군단 참모들이 라루 선장을 만나기 위해 승선했다. 작전 참모인 잭 차일즈 중령은 라루 선장에게 "여기 모여 있는 북한 주민들은 3만5000명 정도다. 이들은 전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민간인"이라며 "우리는 흥남을 포기할 계획인데 공산주의자들은 여기서 발견되는 사람들은 모조리 사살하겠다고 떠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라루 선장은 "알았다. 우리가 저들을 구출하겠다"며 "될 수 있는 한 많이 데리고 가겠다"고 답했다. 피란민들의 승선은 12월22일 금요일 오후 9시30분부터 시작됐다. 선원들은 배 안 갑판 밑에 있는 짐칸인 선창부터 사람들을 채워 넣었다. 찬 바람이 몰아치는 갑판 위도 사람들로 빼곡히 들어찼다. 최대 1200명이 탈 수 있는 배에 무려 1만4000명이 탑승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2월23일 오후 2시54분 흥남항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난방이 되지 않고 먹을 것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새 생명 5명이 태어났다. 승무원들은 아이들에게 '김치 원', '김치 투' 식으로 별명을 붙여줬다. 항해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피란민 중 일부가 항공유를 실은 드럼통 위에 불을 피우다 배 전체를 폭발시킬 뻔했고, 한국군 헌병으로 위장해 침투한 중공군 간첩이 발각돼 체포되기도 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부산항에 정박해 물자를 보급받은 뒤 12월25일 오전 10시54분 부산항을 출발해 낮 12시42분에 거제도에 도착했다. 피란민들은 상륙정에 옮겨 타고 다시 땅을 밟았다. 사람들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항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평했다. 라루 선장은 1960년 미국 상선 업계 최고 훈장인 선행 훈장을 받으며 소회를 밝혔다. 그는 "아무리 논리적으로 생각해봐도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단 한 명의 인명 손실도 입지 않았다"며 "금방이라도 재앙을 몰고 올 것만 같았던 위험들이 몇 번이고 기적적으로 비껴가고는 했다"고 말했다. 라루 선장은 또 "대부분의 사람은 열광하겠지만 나와 다른 선원들에게는 극한의 전쟁 상황에서 인간성과 비인간성을 반추해보는 계기일 뿐이었다"며 당시 사건이 성찰의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결국 라루 선장은 1954년 11월26일 수도 생활 지원자가 돼 수도원에 들어갔다. 1955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마리너스라는 수도자 명을 받고 이후 종교인의 삶을 살았다. 라루 선장은 87세를 일기로 2001년 10월14일 세상을 떠났다.
기네스북은 2004년 9월21일 '흥남철수작전 당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1만4000명을 구출한 기록은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세계 기록이다'라고 인정했다. 국가보훈처는 라루 선장의 공을 기리기 위해 그를 올해 1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