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언의 책과 사람들]무성 영화시대 풍미했던 '명금'
얼마 후인 6월23일 조선인 상설관 우미관에서도 이 영화가 상영된다. 경성의 영화애호가들이라면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상관없이 '명금'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상영되는 편수가 늘어날수록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명금'은 이후 10여 년간 그야말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영되면서 그 명성이 조선 전역에 알려졌다. 연속영화는 지금의 연속극처럼 20-30분 분량의 에피소드가 15편정도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완결된 이야기로 구성되었는데 보통 에피소드의 마지막 부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암시하는 아슬아슬한 장면으로 끝났다. 이러한 장면은 다음 에피소드와 연결되었는데, 보통 1주일에 한번씩 프로그램이 바뀌던 시절 관객들은 연속영화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영화관을 찾았다. '명금'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는 소위 연속영화의 시대였다. 당시 극장 프로그램은 지금의 TV방송처럼 뉴스에서부터 다큐멘터리, 코미디, 멜로드라마, 액션영화 등 다양한 장르 영화들이 3시간 정도로 구성되었다. 이중 가장 인기를 끌었던 것이 바로 연속영화였다. 미국의 영화회사 유니버설은 연속영화를 만들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영화산업이 멈춘 프랑스와 이태리 등 유럽의 영화회사들을 대신해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 세계영화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 유니버설에서는 1916년 7월 이후 발매한 영화에 대해서는 필름 매매가 아닌 임대 형식으로 필름을 배급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 제작된 '명금'의 경우 필름을 소유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상영할 수 있었지만 1916년 7월 이후에 제작된 영화들은 계약한 영화관에서만 상영하고 다시 필름을 돌려줘야 했다. 수많은 연속영화 중 '명금'이 전국에서 상영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명금'은 10여 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에서 여러 차례 상영되었다. 조각 난 금화에 새겨진 정보를 가지고 숨겨진 보물을 찾는 이야기는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여기에 악당들과의 대결이 주는 긴장과 스릴은 극장 안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영화 속 주인공인 프레드릭 백작, 키티 그레이, 로로는 그야말로 전세계적인 인기였다. 이 무렵 서울의 아이들은 '명금'의 주요 등장인물을 흉내 내며 노는 소위 '명금놀이'를 즐겼을 정도였다. 변사가 영화를 설명해 주던 이때 최고의 인기 변사는 우미관의 서상호였다. 그는 막간에 자전거 클랙슨을 가랑이에 끼고 추는 소위 '뿡뿡이 춤'으로 인기가 있었다. 그러던 그가 연설조의 우렁찬 목소리로 '명금'을 설명하면서 일약 조선 최고의 인기 스타로 각광받는다. 그는 우미관에서 뿐만 아니라 우미관에서 조직한 순회영사대의 일원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명금'을 설명했다. '명금'의 인기는 서상호의 목소리를 타고 전국에 퍼졌다.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서상호를 영화관으로 전환한 단성사에서는 첫 번째 스카우트 대상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그런 서상호는 나중에 아편중독자가 되어 무대에 설 수 없게 된다. 탑골공원에서 행인들을 대상으로 '명금'을 설명하면서 구걸을 했다. 결국 전성기를 보냈던 우미관의 화장실에서 숨을 거둔 그는 죽음까지 영화처럼 비극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기 있던 영화들은 영화소설로 출간되는 게 그 당시 출판문화의 경향이었다. 영화소설 '명금'은 1920년 신명서림에서 윤병조의 번역으로 발간되었고 1921년에는 송완식 번역으로 영창서관에서도 출간되었다. 내가 소장한 태화서관 발행 '명금'은 무려 1934년에 나온 책이다. 영화가 제작된 지 20년 정도가 흘렀고, 신명서림 판이 발행된 지 15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책이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영화 '명금'은 무성영화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인기영화였으며 영화소설 '명금' 당대 최고의 스테디셀러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한상언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