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신근의 반려학개론]후배 수의사들을 위한 충언
문득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인 1988년이 생각난다. 당시 서울 시내 동물병원 수는 90여 곳에 불과했다. 그해 필자는 서울 중구 필동, 그러니까 퇴계로에 '윤신근 애견종합병원'을 오픈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파격이자, 튀는 행동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동물병원'이 없던 시절이었다. 모두 '가축병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개업하고 '환견'(아픈 개, 당시에는 고양이는 거의 없던 시절이라 환묘는 정말 가물에 콩 나듯 있었다)을 기다리면서 필자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병원에 환견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 물론 동물을 사랑해 수의사가 된 사람으로서 아픈 개가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개를 많이 키우면 자연스럽게 환견도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평소 필자가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던 '식견 악습'을 끊는 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필자는 '반려동물 문화'(당시 표현으로는 '애견 문화') 확산에 나섰다.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국민 소득도 증가하고, 의식 수준도 깨어나던 때여서 적기라고 판단했다. 1990년 '동물보호연구회'를 설립했고, 적극적으로 미디어에 필자를 노출했다.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고, 동물을 소재로 한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했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동물 관련 취재에 인터뷰어로 단골 등장했다. 인지도를 높이겠다는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지만, 개, 고양이부터 사자, 호랑이 같은 야생동물까지 국민에게 동물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 흥미도 갖게 하고, 동물을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만들겠다는 사명감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필자는 수의사로서 반려동물 진료에서도 남보다 앞서가려고 했다. 반려동물 선진국의 최신 기술을 국내에 도입하고자 애썼다. 반려견 예방 백신을 평생 한 번 맞힐까 말까 하던 시절에 효과가 더욱더 확실한 '5차 접종'을 시작했다. '심장사상충'이라는 것이 뭔지 몰라 건강하던 반려견을 속절없이 떠나보내던 때에 '예방'을 제안했다. 사람용 의료기기도 동물에게 과감히 적용했다. 수술 시 절개 부위를 스테이플러를 사용해 실로 꿰매는 것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봉합했다. 칼이 아닌 '하모닉'이라는 의료기기를 사용해 수술 시간을 단축함으로써 반려견이나 반려묘가 스트레스를 덜 받게 했다. 이런 시도들은 이젠 일반화했지만, 필자가 시도할 때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 시절 수의계 주류를 형성하던 선배 수의사들에게 환영을 받거나 칭찬을 듣기는커녕 "돈 잘 번다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비아냥부터 "돈독이 올랐다"는 음해까지 필자는 적잖이 시달려야 했다. 1990년대 아니 2000년대까지도 동물병원 중 상당수가 개를 직·간접적으로 판매하던 때였다.. 환견이 많지 않으니 먹고 살기 위해 수의사로서의 명예도 내려놓아야 했다. 하지만 필자는 오픈 이후 한 번도 개를 판매한 적이 없다. '애견의 메카'라고 불리던 지역에서 수십 년 동안 운영하고, 좌우에 펫숍(당시에는 애견센터)들이 즐비하다 보니 '윤신근도 개를 파는 것 아니냐?'고 오해한 일부 사람도 있으나 필자는 개까지 팔 정도로 쪼들리지도, 한가롭지도 않았다. 가축병원이 오히려 낯설고 동물병원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2020년대다. 수의사도 진료만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게 됐다. 이제 수의사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다. 아니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양질의 의료로 동물들을 보살피는 것, 수의사의 본업을 제대로 해야 한다. 반려동물 인구 1500만 명 시대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감히 자부하는 선배의 충언이다. 윤신근 수의사·동물학박사 한국동물보호연구회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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