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잘 봐, 언니들 이제 시작이다!"…'스우파' 돌풍 왜?
'여적여' 대신 '존중 문화' 구축…'스포츠맨십'도 눈길
케이블 음악채널 엠넷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에서 우승한 댄스 크루 '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가 마지막 방송에서 던진 출사표다. 국내외에 '스트리트 댄스' 신드롬을 일으킨 '스우파'가 9주간의 여정 끝에 지난 26일 성황리에 끝났다. 하지만 허니제이가 예고한 것처럼, '스우파' 열풍은 이제부터가 본격적이다. 홀리뱅을 비롯 프로그램에 출연한 여덟 크루 모두에게 각종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고, '스우파'에서 파생된 후속 프로그램·콘서트도 잇따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시작 전 허니제이는 박재범의 춤 잘 추는 백댄서, '웨이비'의 리더 노제는 '엑소' 카이의 예쁜 백댄서 등 빈약한 수식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이들은 더이상 무대 측면이 아닌 중심에 성큼 서게 됐다. 마지막 방송에서 허니제이에게 음원 '노 브레이크'를 선물한 래퍼 사이먼 도미닉(쌈디)의 말이 증명한다. "예전에는 '쌈디 옆의 댄서가 부럽다'는 댓글이 주였는데, 이제는 '허니제이 옆에서 랩하고 있는 쌈디가 부럽다'라는 댓글이 많다." ◆센언니들, 통쾌한 댄스 배틀 허니제이가 이끄는 홀리뱅, 카이의 댄서이자 화려한 외모로 팬덤을 보유한 노제가 리더로 있는 웨이비, 트와이스·있지(ITZY) 등 핫한 걸그룹 안무가 리정이 속한 'YGX', 청하의 안무가 가비가 속한 '라치카', 미국 댄스 경연 프로그램 '월드 오브 댄스(World Of Dance)' 시즌3에서 제니퍼 로페즈의 극찬을 아이키의 '훅', 구독자 2440만명을 보유하고 있는 원밀리언 댄서 효진초이의 '원트', 걸스 힙합 댄서의 자존심인 리헤이의 '코카N버터', 댄서들의 춤선생님 모니카와 레전드 왁커 립제이의 '프라우드먼'…. 업계에선 유명했지만 대중에게 다소 낯설었던 50여명의 댄서가 참여한 이 프로그램은 지난 8월24일 첫 방송에서 포장을 벗은 뒤 대세가 됐다. "진짜 죽이는 거에서, 더 죽이는 거 해야죠!"(코카N버터 제트썬) 초창기엔 '센 언니'들의 대결에 방점이 찍혔다. 여성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예술적 욕망과 끼를 거침 없이 드러냈다는 점이 주목 받았다. 첫 대결장 이름부터 '파이트 클럽'이었다. 한팀 씩 대결장으로 입장할 때, 다른 팀들이 그 팀을 평가한 영상이 상영됐다. "똑같은 걸 반복할 거 같다" "영(Young)하지 못하다" 등 적나라한 평가가 이어진다. 박한 평가를 받은 일부 참가자들의 입에선 욕이 쏟아져나오고 그 입은 모자이크 처리됐다.
프로그램의 첫 번째 대결 타이틀도 '노 리스펙트(NO RESPECT)'. 즉 약자 지목 배틀이었다. 한 참가자가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약자를 지목, 대결을 벌이는 포맷이다. 하지만 이런 형식이 '존중 없음'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라치카의 피넛은 프라우드먼의 '왁킹 여제' 립제이를 지목했다. 그녀는 앞서 립제이와 여러 번 대결했으나,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결국 이번에도 재대결 끝에 패배했다. 하지만 같은 무대에서 마치 합을 맞춘 듯한 동작으로 대결을 한 순간 만큼은 두 사람이 동등했다. 쌓인 애증은 지고, 연대의 장은 꽃 피웠다. '스우파'를 통해 만들어진 허니제이와 리헤이의 드라마는 어느 영화 이상이었다. 허니제이와 리헤이, 코카N버터의 다른 멤버 제트썬 등은 댄스 크루 '퍼플로우'로 7년간 동고동락했다. 하지만 불화로 허니제이를 제외한 멤버들이 팀을 나왔고 5년간 냉냉한 관계를 유지했다. 첫 배틀에서 허니제이는 리헤이에게 약자로 지목 받았다. 승부에서도 지고, 쓴 맛을 봤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마치 합을 맞춘 듯 똑같은 안무를 선보인 두 사람의 몸엔 같은 세월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허니제이는 양 팔을 번쩍 들어 리헤이와 포옹했다. 허니제이는 리헤이에게 "멋있어졌는데?"라며 미소 지었다. 최종회에선 리헤이가 우승한 허니제이를 먼저 안았다. 그렇게 마음은 몸보다 먼저 반응한다. 이런 모습에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냐는 일부 우려는 눈 녹듯 사라졌다. 열정을 다해 춤을 춰 대결한 뒤 패배하면 깨끗히 인정하는 모습은 '스포츠맨십'으로 통했다. 무용을 전공한 김태희 공연칼럼니스트는 "무대에서는 한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게 승부를 겨루지만, 그 네모난 공간을 벗어나면 아주 평범한 언니와 동생이 되는 반전 매력이 있었다. 그야말로 '리스펙트 정신'에 부합한다"고 봤다. ◆각자 개성을 존중한 '리스펙트'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또 매력적이었던 점은, 실력뿐만 아니라 저마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댄서 그 자체였다. 최정남 PD도 "국내에 매력이 넘치고 해외에 진출해도 그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여자 댄서들이 많다. 많은 분들에게 댄서들의 매력을 더욱 대중적으로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케이팝 퍼포먼스하면 라치카, 라치카하면 케이팝 퍼포먼스"('케라라케')라는 신조어까지 탄생 시킨 라치카의 리더 가비는 초반에 다른 팀을 늘 비판하는 마냥 센 캐릭터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마음 약하고 멤버들을 아끼는 리더로 밝혀졌다. 아이키는 '아이키와 아이들'로 불린 훅의 멤버들을 성장시키며 참 리더의 모습을 보여줬다. 노제는 계급 미션의 미션곡 '헤이 마마(Hey Mama)' 안무로 챌린지 열풍을 일으키며, 외모가 아닌 실력으로 인정 받는 댄서의 모습을 보여줬다.
무용 전공자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 한성주 대리는 "각 캐릭터마다의 개성 강한 모습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 주는 모습이 개성만점인 MZ세대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면서 "아이키를 비롯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높은 부분도 방송의 매력을 한층 더 높였다"고 봤다. "춤 스타일 또한 각 팀마다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고 멋있는데 그걸 다른 팀들이 폄하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 또한 기존 배틀 형식의 방송과는 차별이 있지 않았나 싶다"고 덧붙였다. 김태희 칼럼니스트도 "각각의 댄서들은 크루라는 틀 안에서 군무를 이루지만 모두가 개성이 있고, 군무라는 이유로 그것을 굳이 가리려고 하지 않는다. 시청자가 내 '최애' 한 명 정도는 만들 수 있는 다양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라치카 등은 '맨 오브 우먼 미션' 당시 퀴어(성소수자) 문화를 적극적으로 품었는데 "소수 의견과 소신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모습에서 그야말로 '쿨'함을 드러냈다"고도 김 칼럼니스트는 봤다. ◆스트리트 댄스 자체에 대한 주목 무엇보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여성 댄서'가 아닌 그냥 '댄서'를 조명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여성 댄서의 신체를 관음증적 시선으로 훑는 게 아닌,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췄다. 춤이라면 순수무용(발레, 한국무용, 현대무용 등을 대체로 지칭)과 대중무용만 있다고 생각한 대중에게 '스트리트 댄스'의 전문성과 그 안에서도 왁킹, 보깅 등 세부 장르를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예술성도 드러냈다 김태희 칼럼니스트는 "소위 백댄서 정도로 치부되던 춤의 위치를 전복시켜 재미를 만들어냈다. 우리가 기존에 TV를 비롯한 미디어에서 보던 (대중음악에 맞춘) '춤'은 댄스가수들이 추는 춤이 전부였으나, 우리가 기억하는 춤에는 모두 안무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끄집어냈다"고 설명했다. "자칫 백댄서나 크레디트에만 존재하는 안무가에 그칠 수 있는 이들을 무대 중앙에 내세워 그야말로 스타에 가려졌던 매력을 들췄다"는 것이다.
씨엘(CL), 보아, 제시, 현아의 안무를 재해석한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미션이 큰 호응을 얻었던 이유다. 한류의 선구자인 보아, 그룹 '블랙비트' 출신 황상훈, 인기 K팝 그룹 'NCT' 멤버 태용이 심사위원(파이트 저지)로 나선 점도 권위를 부여했다. 이 덕분에 글로벌 인기의 척도인 동영상 플랫폼에서도 '스우파'의 존재감이 빛났다. 엠넷 TV 공식 유튜브 채널 계정을 통해 게재된 관련 영상 누적 조회수는 약 3억4000만 뷰(10월23일 기준)를 기록했다. 김태희 칼럼니스트는 "스트리트 댄스는 특성상 유튜브 플랫폼을 기반으로 훌쩍 성장했다. 해외 시청자들의 유입도 쉽다. 그런 흐름에 걸맞게 '스트릿 우먼 파이터' 프로그램 자체도 평가에 유튜브 조회수 항목을 넣는 등 장치를 설정했고 자연스레 '조회수'와 '좋아요'를 위한 영상 공유가 확산되며 인기를 높인 영향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함께 스트리트 댄스의 한 종류인 브레이킹이 '2024 파리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과 맞물려 스트리트 댄스는 당분간 화제몰이를 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댄서들의 만족도가 높은 프로그램이었다. 가비는 "댄서를 하면서, 이런 사랑을 받을 줄 몰랐다"고, 립제이는 "춤추길 정말 잘했다"고 고백했다. 허니제이는 우승 소감에서 "대한민국 댄서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돼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기 서있는 여덟 크루 말고도 굉장히 많은 댄서들이 준비돼 있다. '스우파'를 계기로 댄스계에 많은 발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스우파'는 열풍에 힘 입어 다양한 후속 프로그램을 마련 중이다. 오는 11월부터 여덟 크루가 모두 나오는 전국 투어 콘서트 '스트릿 우먼 파이터 온 더 스테이지(ON THE STAGE)'를 여는데 서울 공연이 1분만에 전석 매진됐다. 오는 연말에는 여덟 크루의 리더들이 직접 여고생 크루를 선발하는 스핀 오프 '스트릿 걸스 파이터' 방송이 예정됐다. JTBC '아는 형님', SBS '런닝맨 등' 타사 프로그램의 여덟 크루 리더들에 대한 러브콜도 이어지고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