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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다음날 "왕비 죽였다"…日 외교관 추정 편지 발견

등록 2021-11-16 12:38:17   최종수정 2021-11-22 10:4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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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서 명성황후 시해 "생각외로 쉬웠다" 밝혀

전문가 "본인 진필 틀림없어…가치 높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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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고종·명성황후 가례재현의 모습. 2019.10.10. (사진=서울시 제공). 사진과 기사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서울=뉴시스] 김예진 기자 =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실행 그룹' 중 한 명인 일본의 외교관이 시해 다음날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나왔다. 편지에는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는 내용이 실렸다.

16일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발견된 서신은 당시 조선에 영사관보(補)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1865∼1945)이 발송인인으로 된 편지다.

발견된 편지는 총 8통이다. 자신의 고향 니이가타(新潟)현 나카도리무라(中通村)에 살았던 친한 친구이자 한(漢)학자인 다케이시 데이쇼(武石貞松) 앞으로 보냈다. 1894년 11월 17일부터 사건 직후인 1895년 10월 18일까지 발송된 것이다.

특히 명성황후 시해 다음 날인 1895년 10월 9일자인 6번째 편지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실렸다.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 "(궁) 진입은 내 담당 임무였다. 담을 넘어 (중략) 겨우 오쿠고텐(奧御殿)에 도달해 왕비를 시해했다"고 명기됐다.

또한 "생각 외로 쉬웠다. 오히려 놀랍다"고 감상까지 적어놓았다.

편지는 현재 나고야(名古屋)시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계 미국인 우표·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長谷川·77)가 고물 시장에서 발견한 것이다.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을 쓴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가 편지의 흘려 쓴 붓 글씨를 판독했다.

신문은 편지가 원래 보관돼 있었다고 여겨지는 장소, 기록된 내용, 소인, 봉인 편지 작성 방법 등을 고려했을 때 호리구치의 친필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문자는 "사건의 세부(상세한 내용), 가족에 대한 기술 등을 보더라도 본인의 진필임이 틀림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역 외교관이 왕비 시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알리는 문면에 새삼 생생한 놀라움을 느낀다"며 "아직까지도 불분명한 점이 많은 사건의 세부를 밝히는 열쇠가 될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평가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1895년 10월 8일 일본 군인과 외교관, 민간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불평등 조약이었던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아래 명성황후 시해 실행 그룹의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재판권은 미치지 못했다. 사건 다음 해인 1896년 1월 실행그룹 중 육군장교 8명은 군법회의에서 무죄를 받았다. 편지를 쓴 것으로 추정되는 호리구치와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등 48명도 히로시마(広島) 지방재판소 예심에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소송이 중지돼 석방됐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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