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품격과 위엄의 사랑, 전복과 붕괴의 걸작…'헤어질 결심'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박찬욱 감독의 새 영화 '헤어질 결심'에는 흔치 않은 품위가 있다. 단 하나의 숏(shot)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이 작품은, 더이상 새로운 사랑영화는 없다는 사람들에게 로맨스영화가 다다를 수 있는 또 다른 장소를 내보인다. 품위와 위엄을 내세우며 도달한 이 경지는 단정(斷定)하지 않는 태도에 기반하는 것 같다. '헤어질 결심'은 스릴러를, 멜로를 단정하지 않는다. 소통과 관계를 단정하지 않는다. 가해와 피해도 단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을 단정하지 않는다. 대신 골똘히 들여다본다. 138분을 그렇게 응시한 뒤에 관객에게 묻는다. '이 정도라면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헤어질 결심'은 짙게 깔린 안개의 영화이고, 몰아치는 파도의 영화이고, 높이 솟은 산의 영화이고, 떴다 진 태양에 관한 영화이다. 이 작품은 박찬욱의 최고작인가. 그건 모르겠다. 다만 걸작인 건 분명하다. '헤어질 결심'은 필름 누아르를 전복한다. 죽은 남편, 용의선상에 오른 아내,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구도는 전형적이다. 이제 그 치명적 매력의 용의자 아내에게 마음을 뺏기고만 형사가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아내 역시 몰락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면 이 누아르는 완성될 것이다. 박 감독의 새 영화는 얼개만 보면 이 클래식한 이야기를 답습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클리셰에 가까운 껍데기를 들춰내고 속을 들여다보면 흔히 말하는 누아르라는 것의 상투성이 뒤엎어져 있는 걸 목격하게 된다. 이런 방식은 박 감독의 주특기이다. 그의 영화는 원작이 되는 작품에서 일부 요소를 차용하는 대신 그것들을 손에 쥐고 예상치 못한 길로 진입하며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곤 했다. '올드보이'가 그랬고 '박쥐'가 그랬으며 '아가씨' 역시 그랬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로맨스를 뒤틀어 놓는다. 단번에 타올라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게 흔한 사랑영화의 도식이라면, '헤어질 결심'은 그런 사랑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는 듯 자꾸만 어긋나고 때로는 지연되는 감정의 양상을 펼쳐놓는다.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의 관계는 시작과 끝이 불분명하고, 관계의 정체 역시 불명확하다. 대신 이 영화는 정교하게 쓰인 대사들과 세심하게 다듬어진 행위들로 그들이 나눈 감정을 에둘러 설명하고 흐릿하게 정의한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에는 '사랑한다'는 식으로 해석되는 대사는 있어도 "사랑한다"는 대사는 없다. 이렇게 이 영화에는 시종일관 좀처럼 잡히지 않는 마음들이 떠다니지만, 이상하게도 마지막 장면까지 다 보고나면 결국 절절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의 개척자가 겪어야 했던 불행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보인 존엄에 자꾸 마음이 아리다. 누아르를 뒤엎고 로맨스를 비틀면서 '헤어질 결심'이 단행하는 일은 타자화 된 여성을 구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헤어질 결심'은 그저 악녀로, 종종 팜파탈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남편 잡아먹은 여자라는 모욕으로 뭉뚱그려진 수많은 여성 캐릭터를 바로 세운다. 그래서 서래는 그저 '독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도 고꾸라지지 않을 정도로 강인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용기를 내며, 자신이 추구하는 단 하나의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정도로 담대하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한 여성이 격조 있는 인간성을 무기로 남성 권력의 무지몽매한 폭력에 맞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래는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고 화를 내며 뭉개진 자존심이나 들먹이는 남자에게 오히려 되묻는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박 감독은 서래와 해준에 관해 말하기 위해 만물을 활용한다. '헤어질 결심'은 산에서 시작해 안개를 경유해 바다에서 끝나는 이야기이다.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마치 땅 아래로 사라지듯 스스로 자취를 감춰버리는, 태양처럼 살았던 한 존재에 관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산과 안개와 바다와 하늘과 땅과 태양이 모두 있는 이 영화의 포스터는 '헤어질 결심'의 요약본으로 보이기도 한다. 박 감독은 서래와 해준의 마음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인간의 모든 활동을 모두 끌어다 쓴다. 이 영화에는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자는 등 인간 행위 전체가 빠짐 없이 있다. 다만 동시에 볼 수 없고, 똑같이 들을 수 없으며, 틀림 없이 말할 수 없고, 정확히 느낄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기어코 산에 오르고, 누군가는 바다에서 갈팡질팡하며, 누군가는 결국엔 땅을 파고 들어간다. 사랑의 비극은 늘 그렇듯 딱 들어맞지 않는 타이밍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었다. '헤어질 결심'에서 박 감독이 보여주는 연출의 정수(精髓)는 언어와 스마트 기기에 있다. 스마트 기기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서래와 해준을 연결하는 매개체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이 최첨단 장비의 전격적인 활용은 이 작품을 고전적이면서도 동시대성을 가진 예술로 격상한다. 스마트 기기의 통역 앱은 두 사람이 대화할 수 있게 해주지만 그들의 감정 일부를 차단한다. 스마트 기기의 녹음 기능과 검색 기능은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마침내 확인할 수 있게 해주지만 감정의 교환을 지연하고 정체시킨다. 스마트 기기의 위치추적 기능은 상대의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지만 정확하게 짚어주지는 못해서 만남을 유도하면서도 만남을 확답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헤어질 결심'은 계속해서 근접하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고 불명확한 스마트 기기의 한계가 결국 사랑의 속성이라고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자는 '헤어질 결심'을 두고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이창'(1954)이나 '현기증'(1959)을 언급하지만, 그런 시각은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자칫 이 작품의 정체를 규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비교는 아니다. 어떤 레퍼런스를 언급하더라도 이 영화는 명백히 박찬욱의 영화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모순과 모호로 가득차 있었다. 다만 그 부조리한 세계에 그대로 남거나('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부조리를 제거하고 탈출하느냐('박쥐' '아가씨')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헤어질 결심'은 어떤 이는 남겨놓고 또 어떤 이는 탈출시킨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정훈희의 노래 '안개'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박찬욱 버전이라고 보는 게 가장 적절할 것이다(노래 '안개'는 김수용 감독이 1967년에 내놓은 영화 '무진기행'의 주제곡이기도 했다). 배우 탕웨이와 박해일은 대체 불가한 연기를 한다. 탕웨이는 불행했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끝내 지켜낸 서래를 특유의 신비로움과 올곧음으로 보여준다. 그의 연기는 높으면서 깊고 게다가 넓기까지 하다. 이런 종류의 카리스마를 가진 배우는 탕웨이 외에는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헤어질 결심'은 '색, 계'(2007) '만추'(2011) '지구 최후의 밤'(2019)과 함께 탕웨이의 대표작으로 남을 것이다. 박해일은 그가 얼마나 섬세한 배우인지를 다시 한 번 증명한다. 마치 캐릭터를 세공하는 듯한 그의 연기는 이 작품의 뒤를 든든히 받친다. 몇 몇 장면에서는 새삼 그의 눈이 얼마나 영화적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고경표·김신영·박용우 등은 짤게 등장하는데도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연기를 한다.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은 박 감독의 전작에 있는 그 어떤 엔딩보다 아름답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 이상으로 고통스럽다. 이 장면에는 누군가에게 결코 해결되지 않을 사건으로 남겨짐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이 무너지고 깨어지는 걸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 있다. 마침내 합일하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결국에는 심장을 뺏는 데 실패한 사람의 체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유일한 이유가 되어준 사랑을 만날 수 있었서 다행이었다는 안도가 있다. 이제 관객은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오묘한 마지막 시퀀스를 보고나서 극장을 나선 뒤에 한동안 서래와 해준에 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