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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필름]거장의 영화, 결국 가족이었군요…'파벨만스'

등록 2023-03-22 09:34:08   최종수정 2023-03-22 10: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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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왜 파벨만스(Fabelmans)인가. 영화 '파벨만스'(The Fabelmans)에 관해 얘기하려면 일단 이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작품이 영화감독을 꿈꾸던 소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야기를 그렸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파벨만스'는 필연적으로 영화에 관한 영화가 돼야 한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인생이 유년 시절 아버지에게 선물받은 8㎜ 카메라에서 시작했으며, 이 거장의 인생은 결국 영화로 점철돼 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영화 제목은 극중 스필버그 감독을 투영한 캐릭터 '새미 파벨만'의 성(姓)이다. 영화 혹은 영화라는 꿈을 상징하는 단어나 문장, 또는 스필버그 감독 자신을 드러내는 표현이나 말이 아니라. 일단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파벨만스'는 스필버그 감독의 자서전이 왜 그의 가족을 뜻하는 말인 파벨만스가 돼야 하는지 답하는 작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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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영화를 가볍고 편하게 즐겨도 상관 없다. 러닝 타임 151분이 다소 긴 듯해도 가족영화이자 성장영화로서 '파벨만스'가 품은 그윽한 온기와 유머는 제 아무리 냉철한 관각이라도 무장해제시킬 것이다. 스필버그 감독과 오랜 대화를 거쳐 완성했다는 토니 쿠슈너 작가의 각본은 흠잡을 데가 없고, 스필버그 감독의 연출은 유려하기 그지없다. 몇 몇 장면은 황홀하고, 모든 신(scene)은 세공돼 있으며, 어떤 연기는 감탄을 자아내고, 일부 대사는 가슴에 와 꽂힌다. '파벨만스'는 분명 푹 빠져 볼 수밖에 없는 영화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내 영화는 경험에 비춰 만들었지만, 이 영화는 내가 가진 기억 그 자체"라는 스필버그 감독의 말에서 드러나듯 '영화의 왕'으로 불리는 거장의 실제 어린 시절이 궁금할 영화광들에겐 이 작품이 일종의 아카이브가 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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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만스'는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선보이는 마스터 클래스이기도 하다. 영화는 어린 새미가 부모와 함께 세실 B 드밀의 1952년작 '지상 최대의 쇼'를 보러 가는 장면으로 문을 연다. 새미가 이 작품의 기차 충돌 액션에 반해 영화에 빠져든다는 건 상징적이다. 세계 최초의 영화 '기차의 도착'이 기차가 화면을 뚫고 지나가는 듯한 스펙터클로 관객을 매혹한 영상이지 않았나. '지상 최대의 쇼'를 보기 전 새미의 부모가 영화를 정의하는 대사 역시 의미심장하다. 공학자인 새미의 아버지 버트는 "영화란 영사기로 1초에 사진 24장을 내보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사진(motion picture)"이라고 설명하고, 예술가인 어머니 미치는 "영화는 꿈이야, 잊히지 않는 꿈"이라고 말한다. 그간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들이 이뤄낸 기술적 성취와 도달한 감성의 깊이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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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만스'는 새미가 가족·친구들과 함께 만드는 각양각색의 작품들로 때로는 영화를 한껏 예찬하고 때로는 서늘하게 경계한다. 영화는 즐거운 놀이라고 말하다가도 그렇지만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 말한다. 어떤 영화는 관객을 웃고 울게 하지만 몰아붙이고 좌절하게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새미가 좋은 카메라만큼이나 좋은 편집 기계를 원하는 모습을 보면 영화라는 건 결국 편집의 예술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고, 캐릭터에 몰입한 배우의 열연이 영화감독의 비전을 궁극적으로 완성해준다고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또 스타를 탄생시킬 수도, 누군가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파벨만스'는 이 과정을 통해 스필버그 감독이 약 60년 간 쌓아올린 필모그래피를 경유한다. 새미가 가족과 홈비디오를 찍고, 동생들과 호러영화를 만들며, 친구들과 서부극 및 전쟁영화를 완성하고, 동기생들의 일상으로 청춘물 혹은 로맨틱코미디 등을 내놓는 걸 보면 관객은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온갖 영화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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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스필버그 감독의 어린 시절을 담았기에 영화에 관한 영화가 될 수밖에 없지만, 그에겐 꿈이 곧 영화였기에 당연히 꿈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일을 하고 싶다는 새미에게 아버지 버트는 "일은 실재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영화는 실재하지 않는 환상이 아니냐"고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한다. "영화는 취미(hobby)로 하면 되지 일이 될 수 없다"고도 한다. 버트의 말에서 '영화'를 '꿈'으로 바꿔 놔도 문장은 성립할 것이다. 그리고 새미가 영화를 알게 된 뒤 겪은 모든 일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 경험하게 되는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멀어지려고 해도 자꾸만 새미 손에 쥐어지는 카메라처럼 결국 새미가 영화로 되돌아가는 건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그것(영화·꿈)이기 때문이다. 어머니 미치는 말했다. "네 가슴이 뛰는 일을 해야 돼. 네 인생은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았으니까. 엄마에게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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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멈췄다면 '파벨만스'는 할리우드 제왕이 필모그래피 끝자락에 와서 만든 겸손하고 따뜻한 소품 정도로 남았겠지만, 스필버그 감독은 예술과 인생을 논하는 동시에 한 인간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기어코 파고들어감으로써 '파벨만스'를 또 한 편의 걸작으로 격상한다. 말하자면 새미(스필버그)라는 소년과 새미가 사랑해마지 않는 영화는 The Fabelmans, 바로 그의 가족에게서 태어났고 그의 가족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 '더 파벨만스'는 새미가 영화에 빠져들어 영화를 만들고 상영하는 모든 순간을 가족과 함께하게 한다. 다만 이 작품은 영화라는 새미의 예술과 그의 가족이 조화를 이룬 모습 뿐만 아니라 영화와 가족이 불화하고 이 과정을 어렵사리 통과한 새미가 본격적으로 영화판에 발을 내딛는 걸 보여줌으로써 스필버그 감독이 '파벨만스'를 결코 감상에 젖어 만든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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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만스'는 새미의 예술이 가족과 함께 탄생했으나 동시에 가족을 찢고 나와 완성돼 간다고 말함으로써 스필버그 감독의 예술관을 드러내 보인다. 새미가 만든 영화 중 삶의 진실을 담은 가장 드라마틱한 작품은 그가 원했던 전쟁영화가 아니라 만들기 귀찮아 했던 가족영화였다. 이 영화를 만들고 나서야 새미의 작품들은 단순한 재연과 모방에서 벗어나 진짜 영화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새미는 그 가족영화로 자신의 가족을 두 동강 낸 뒤에야 예술과 예술가의 일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마치 유령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리는 보리스 삼촌은 예술과 가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술과 가족, 그게 너를 둘로 찢어놓을 거란다. 잊지 말거라. 예술은 네게 왕관을 주겠지. 하지만 네 가슴을 찢어놓고 너를 외롭게 할 거야." 그러니까 새미(스필버그)의 영화는 어찌됐든 가족에게 빚이 있다. 그러니 그는 어떤 영화를 만들든 가족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제목이 '파벨만스'가 되는 건 당연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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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 감독은 2017년에 어머니를, 2020년엔 아버지를 떠나 보낸 뒤에야 '파벨만스'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오랜 세월 수십 편의 영화를 세상에 내놨지만, 아직 만들지 않은 한 편의 영화가 그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였고 '파벨만스'는 그렇게 탄생했다. 말하자면 가족은 77세 노장 감독이 평생 고민해온 주제였다. 필모그래피 황혼기에 접어든 스필버그 감독은 이제 어떤 영화를 만들게 될까. 그가 제작자로 참여해 앞으로 공개를 앞두고 있는 영화·드라마만 17편이다. 이걸 보면 다행스럽게도 스필버그 감독은 여전히 영화를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리고 '파벨만스'를 보고 나면 스필버그 감독의 연출작이 어서 빨리 우리에게 찾아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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