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까지 완벽했다…첫 WBC서 써낸 오타니의 드라마
결승전 마무리로 등판…트라우트 삼진 후 포효WBC에서 투타 모두 맹활약…MVP 차지
세계 야구 최강을 가리는 일본과 미국의 2023 WBC 결승전 9회초. 점수차는 고작 1점차였고, 주자 없이 아웃카운트에는 불이 2개 들어와있었다. 일본의 승리와 미국의 패배에는 아웃카운트 하나만 남아있었다. 이 순간 마운드와 타석에서 마주한 것은 메이저리그(MLB)를 대표하는 두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와 마이크 트라우트였다. MLB에서 성공적으로 투타 겸업을 이어가며 2018년 아메리칸리그 신인왕, 2021년 만장일치 리그 최우수선수(MVP)를 거머쥔 오타니와 아메리칸리그 MVP 세 차례 수상에 빛나는 현역 최고 타자 트라우트의 투타 대결은 전 세계 모든 야구 팬들이 기다리던 장면이었다. 오타니가 미국에 진출한 이래로 쭉 에인절스에서 함께 뛴 이들의 투타 대결은 MLB에서는 볼 수 없던 장면이었다. 하필 둘의 '꿈의 대결'은 2023 WBC의 마지막 장면이 될 수 있는 상황에 성사됐다. 오타니가 트라우트에 던진 초구 슬라이더는 볼이 됐다. 이어 스트라이크존 복판에 꽂히는 시속 100마일(약 161㎞)의 공에 트라우트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3구째 직구는 스트라이크존을 살짝 빠져나가는 볼이 됐다. 오타니는 다시 복판에 시속 99.8마일짜리 강속구를 뿌렸고, 트라우트는 헛스윙을 했다. 오타니는 5구째로 시속 101.6마일에 이르는 강속구를 뿌렸지만 너무 힘이 들어갔는지 스트라이크존을 크게 벗어났다. 풀카운트 상황. 오타니는 초구로 던졌던 슬라이더를 택했다.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에 걸치는 공에 트라우트가 다시 한 번 헛손질을 했다. 경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오타니는 모자와 글러브를 집어던지면서 포효했다. 트라우트는 고개를 숙인 채 쓸쓸히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이번 WBC에서 오타니가 써낸 드라마도 완벽한 결말로 끝났다. 오타니의 별명은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이다. 현대 야구 들어 보기 힘든 투타 겸업을 하는 데다 수려한 외모까지 갖춰 붙은 별명이다. 성적을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난해 오타니는 투수로 28경기에 등판해 166이닝을 던지며 15승 9패 평균자책점 2.33으로 활약했다. 타자로도 157경기에서 타율 0.273 34홈런 95타점의 준수한 성적을 냈다. MLB에서 규정이닝(162이닝), 규정타석(502타석)을 동시에 충족한 것은 오타니가 사상 최초였다. 62홈런을 날리며 61년만에 아메리칸리그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쓴 애런 저지(뉴욕 양키스)에 밀려 2년 연속 리그 MVP 수상은 불발됐지만, MVP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이번 대회는 오타니의 WBC 첫 출전이었다. 오타니는 "타격뿐 아니라 투구도 하는 것이 나의 스타일"이라며 WBC에서도 투타 겸업을 선보이겠다고 선언했다. 중국과의 첫 경기부터 오타니는 이른바 '이도류'(투타 겸업)를 펼쳤다. 선발 투수로 등판해 4이닝 1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 쾌투를 선보였고, 3번 타자로 나서 4회 쐐기 2타점 적시 2루타를 날리는 등 4타수 2안타 2타점 2볼넷 1득점으로 활약했다. 이후 1라운드 경기에서 '타자' 오타니도 빛이 났다. 1라운드 4경기에서 타율 0.500(12타수 6안타) 1홈런 8타점 5득점 7볼넷 1도루로 펄펄 날았다. 이탈리아와의 8강전에서도 오타니는 3번 타자 겸 투수로 선발 출전했다. 선발 투수로는 4⅔이닝 동안 5개의 삼진을 잡으며 4피안타 1볼넷 2실점을 기록했다. 실점이 있었으나 마운드 위에서 시속 160㎞가 넘는 강속구를 뿌리고, 타자로는 기습번트로 대량 득점의 물꼬를 텄다. 일본이 멕시코와의 4강전에서 6-5로 짜릿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중심에도 '타자' 오타니가 있었다. 오타니는 4-5로 뒤진 9회말 선두타자로 나서 우중간에 떨어지는 2루타를 때려냈다. 일본은 요시다 마사타카(보스턴 레드삭스)의 볼넷으로 이어간 무사 1, 2루에서 무라카미 무네타카(야쿠르트 스왈로즈)가 좌중간 펜스를 맞추는 끝내기 2루타를 날려 극적인 승리를 챙겼다. 31일 열리는 에인절스의 MLB 정규리그 개막전에 선발 투수로 낙점된 오타니는 4강전부터는 투수로 나서지 않을 전망이었다. 하지만 우승을 목전에 두고 의욕을 불태운 오타니는 결승전에서 구원 등판하겠다고 밝혔다. 오타니는 선발 투수로 나설 때보다 바쁜 하루를 보냈다. 타자 출전을 위해 더그아웃에 있다가, 구원 등판을 준비하느라 외야에 있는 불펜을 오가야 했다.
오타니는 7회말 2루 방면에 강한 타구를 날린 뒤 전력질주했다. 비디오 판독 끝에 최종 세이프 판정이 나오면서 내야 안타를 기록했다. 7회말 내야안타를 치고 출루한 후 요시다의 병살타 때 2루로 슬라이딩을 했던 오타니는 곧장 불펜에서 몸을 푼 뒤 9회초 얼룩진 유니폼을 그대로 입고 마운드에 올랐다. 선두타자 제프 맥닐에게 볼넷을 내줬지만, 무키 베츠에 병살타를 유도했다. 이어 트라우트를 삼진으로 잡고 마침표를 찍었다. 이번 대회에서 타자로 7경기 타율 0.435(23타수 10안타) 1홈런 8타점 9득점, 투수로 3경기 2승 1세이브 평균자책점 1.86(9⅔이닝 2실점)을 기록한 오타니는 대회 MVP의 영예를 누렸다. 실력뿐 아니라 오타니의 리더십과 인성도 대회 내내 주목을 받았다. 오타니는 일본 대표팀에서 더그아웃 리더 역할을 했다. 더그아웃에서 동료들을 독려하는 모습은 수차례 중계에 잡혔다. 4강전에서 9회 2루타를 친 후 일본 더그아웃을 향해 포효하며 일본 대표팀에 힘을 불어넣은 것은 '더그아웃 리더' 오타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상대 팀을 존중하는 모습도 눈길을 끌었다. 오타니는 생업이 따로 있는 선수들로 이뤄진 체코 대표팀의 사진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고는 'RESPECT(존경)'이라고 적으며 예우했다. 4강전을 위해 미국에 도착했을 때 체코 대표팀의 모자를 쓰고 등장하기도 했다. 오타니를 위한, 오타니에 의한, 오타니의 WBC는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오타니는 일본,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스포츠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