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그림' 정상화 화백의 신화..'반복·노력일지'[박현주 아트클럽]
갤러리현대서 '무한한 숨결' 개인전...7월16일까지50년 간 바르고 뜯어내고 메운 '백색 회화' 절정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중)
"매일매일 새로운 걸 하려고 했는데 매일매일 똑같은 게 나왔다." 일명 '하얀 그림'으로 유명한 91세 정상화 화백(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은 시지프(Sisyphe)와 닮았다. 바위 하나를 산 정상까지 쉬지 않고 굴려 올리고 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올리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뜯어내고 메우기'를 무한 반복한다. 50여 년간 한결같다. 흰색을 바르고, 뜯어내고 메우고, 뜯어내고 메우는 그의 반복되는 작업은 우리의 삶 자체다. 누군가에게는 '의미없는 짓'으로 보이지만, 그는 이 무한 반복을 즐겁게 했다. 아무 의미 없는 이 세상에서 또 뜯고, 메우고, 또 뜯고 메우며 삶을 이어갔다. 팔순이 넘어 빛이 났다. '한국의 그림' 단색화가로 세계 미술시장에 이름을 올렸다. 코로나19 사태에도 그의 그림은 '힐링 아트'로 주목받았다. 2020년 런던 레비고비 갤러리에서 개인전,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아무 것도 없는 하얀 그림은 묘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호평이다. 2년 만에 다시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을 연다. 현대화랑과의 의리는 40여 년 째 이어지고 있다. 그가 파리에서 활동할 때 박명자 회장이 그의 작품에 매료되어 1983년 첫 개인전을 열며 '정상화'를 알렸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현대에서 2014년 이후 10년 만에 펼친 개인전으로 1970년대 작품부터 근작까지 40여 점을 소개한다.
◆무엇을 그렸나?..."내 그림은 무한한 숨결" "90이 넘어서도 개인전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1일 개막식을 앞두고 만난 화백은 정정했다. 몇년 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는 소문과 달리 지팡이도 없이 나타난 그는 깨끗한 모습이었다. 무한 작업한 흔적은 얼굴에 있었다. 형형한 눈빛과 입을 꾹 다문 표정은 '고집쟁이 노인'처럼 보이게 했다. "그림 이야기를 해야 밥맛이 돈다. 그림 생각 하는 것 만큼 즐거운 것이 없다." 샴페인과 와인을 곁들인 점심에서 정 화백은 그림 이야기로 신이 났다. "무엇이든 질문하라"고 했다. '그림이 어딨습니까?' 숱하게 들어온 물음을 다시 묻자 (박진영 처럼)이렇게 말했다. "나만의 삶과 공기에 물들어 있어요. 그날, 그 계절이 들어있지요. 날씨, 공기, 감정이 섞여있어요." 무엇을 그리셨나요? "나의 숨결을 그렸지요.' 그는 "바르고 말리고 접고 뜯어내고, 메우고 다시 뜯어내고 메우고...매순간 똑같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이라면서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것을 총동원했고, 면, 공간, 그 양상 등...내 몸에 들어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했다"고 말했다. 같아 보이는 그림이지만 그에겐 새로움이 동력이다. 국전을 반대하며 1950년대 결성해 앵포르멜 운동을 펼친 현대미술가협회와 '악뛰엘'(1962)이념 정신이 있다. "불필요한 걸 가미 시킬 필요가 없는 그냥 전위성이다. 이건 이래야만 한다 등 구구한 잔소리하면 안돼, 그냥 확 밀어 들어가는 거지. 무서운 게 없었으니까. 그땐 관전도 싫지 돈도 싫은 거야. 우리들 아니었으면 요즘 젊은 세대는 못해. 우리였기 때문에 한국 화단에 역사에 남았고 세계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계기가 된 거지. 그나마도 (현대미술가협회)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새로운 일에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주축이 됐다고 봐요."
◆"지우고 다시하는 것에 희열 감동" 조용한 그림이지만 입체주의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다. 대학시절 그린 그의 자화상이 보여준다. "안되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고 지우고 다시 한다. 지우고 다시 하는 것에서 면이 생기고 공간이 생기는 것에 희열이 있고 느낌이 나에게 감동적이었어요." 1932년 경북 영덕 출생으로 마산중학교 2학년때 그림에 빠졌다. 우연히 미술실을 지나가는데 하얀 석고가 보이고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 뭔가 느낌이 있었다. 그림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학교 방과 후 그림만 그렸고, 사생대회에서 늘 상을 받았다. 중학교 4학년때 학제가 개편되면서, 마산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대학시험은 6.25 사변이 나고 였다. 동란이 심각할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였다. 서울이 부산으로 환도하던 때, 서울대도 부산으로 왔다. 1953년도에 부산에서 서울대에 입학했다. 1년 있다가 서울로 갔다. "학도병 친구들은 죽은 사람이 많아. 용케...나는 집에서 그림만 그리고 밖을 나가지 않았어." 그는 대학 4학년 졸업식보다 앞서 '미술 선생님'이 됐다. 인천사범학교 선생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문공부 장관이 발령한 선생이어서 월급도 달랐다. 화폐개혁 전이어서 꽤 두툼했다. 자료 사고 캔버스도 사고, 못 사서 못했던 재료를 마음대로 샀다. 현대미술협회도 참가해서 남이 못하는 것을 했고, 학생이라는 제약에서 해방됐다. 국전, 관전 국민 세금가지고 하는거 철폐해야 한다'는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 (2년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가와의 대화 중) 현대미술가협회, 앵포르멜 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새로운 미술 흐름에 올라탔다. 표현주의 앵포르멜이 한창이던 시기 일본으로 갔다. 이웃나라 일본에 구타이(구체미술)가 앵포르멜과 같은 행동파였다. 우리보다 앞서 있던 일본, 고베였다. "7년 간 있으면서 구타이 작가들과 접촉해서 보니 우리하고 별 다른 게 없었구나를 터득했다." 일본에서 개인전을 하던 그때가 전성기였다. 1962년 첫 개인전 '원시'는 그렇게 나왔다. 지금의 '백색 회화'가 시작된 시대다. '전부 드러내고 부풀어 오르면 터져내고 쓸어내는' 평면적이면서 입체적인 그림의 시작은 전쟁을 겪은 충격이 바탕이 됐다. "파괴성은 아니다. 전쟁을 겪은 우리에게 '폐허'는 허물어진 상황이다. 요철이 올라왔던 상황이 전부 가라앉아 없어져 버린, 완전히 평면화 되버린 상황이다. 있던 게 없어진 허탈감, 이런 것들이 정신적으로 상당히 충격이 컸지요." 거무죽죽한 그림에서 변한 '백색'은 일본에서 나왔다. "그 동기는 작업속에서 자연적으로, 백색으로 돌아간 거다. 점차 색이라는 것에 대한 부담감, 색이 내용에 장애가 된다는 결론에 의해서 점점 색을 억제하다 보니 백색으로 돌아선 거다." 이후 1977년 프랑스 파리로 가 20년 간 살았다. "새로운 흐름, 자극이 됐다.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다." 일본 고베 시기에 진행된 화풍의 완성도를 향해 모든 집념이 고취됐다. 이전의 백색의 격자 무늬 작품에서 좀 더 나아가 검은색, 푸른색, 적색 등 다양한 색, 단색화를 선보이게 됐다. "백색, 하얀 그림은 좋긴 한데 집에 걸면 밋밋하다는 거야. 그래서 푸른색, 빨간색으로 그려 달라는 주문이 많았지." 1992년 11월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1996년 경기도 여주에 작업실을 짓고 자리 잡은 후 그곳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하얀색 전부 다르다. "이 작업은 같으면 안돼" 하얀 그림은 격자무늬로 완성된다. 정교한 밀도 속에서 각각의 그리드가 독립된 개별성을 가지면서도 서로 어울려 조화로운 화면을 구축한다. 그의 평면은 이제 무한대로 끝없이 멀리 들어간다. 그래서 결국 캔버스가 드러난다. "이 작업은 색이 같으면 안돼." 흰색은 모두 같은 색이 아니다. 메워져 있는 것은 하나의 톤이다. 그는 "색깔이 전부 다르고 톤의 질도 모두 다르다"고 했다. "나를 받아들이는 색이 있고, 나를 멀리하는 색도 있어요" 조수 한 명 없이 반복의 흐름을 이어오고 있다. "오롯이 나 혼자 작업합니다. 나는 일 시키면서 못한다. 성품이 그래요. 옆에 사람이 있으면 소리를 지릅니다." 무작위적인 행위. "사실 고달프다. 요즘엔 기력이 없어 못한다. 3~4시간 캔버스를 잡고 있으면 툭 떨어진다." 정 화백은 "내 작품은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모두 봐줘야지, 단순히 보고 흘러버리면 안된다"고 했다. 그는 "오고 가고, 오고 가고, 오고 가는 것을 작가가 만들기 위해서는 전부 질서와 순서가 있다"면서 "작가의 일은 그런 거다 금방 나오는 게 아니다"고 했다. 작품이 되기까지 6개월 이상 소요된다. "과정 과정 과정 연결이 완성체"라고 강조했다. "내 그림, 내용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보고 느끼면 그대로 끝이에요." 어떻게 봐야 하냐고 하자 "쓱 지나 가는 게 아니고 발을 멈추고 보는 것에 대한 느낌, 생각을 내 그림에 둔다면 내 그림은 완전히 성공한 거"라고 했다. "생활 속에서 언젠가 본 사람을 통해서 내 그림을 생각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좋은 겁니다." 사실, 미술 애호가들은 '하얀 벽지'를 볼 때마다 그의 그림이 떠올라 '벽지 그림'으로도 알려져 있다. "맞아요. 현대미술을 알려고 하지 말고 같이 생활에 더불어 살면 돼요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거든. 추상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겠어요?"
와인 한잔을 다 비워 얼굴이 불그스레해진 그는 "건강은 타고 나지만 그림은 타고 난 게 아니다"며 젊은 화가들에게 조언도 남겼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하고 싶어요. '노력이다'. 절대 급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환경이 아니라 노력이 만드는 것이다." 또 미술애호가들에도 당부했다.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세요. 문화가 달라집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때 그의 말처럼 "입에 거품 물게 가난했던 시대"를 뚫고 평생 그림만 그려온 그는 "아버지한테도 이긴 그림"이라고 했다. "학창시절 아버지는 내가 그리던 그림을 뺏어 대문 앞에 집어던졌고, 미대를 가는 걸 반대했었다." "그래도 화가 하길 잘했지요. 그 선택을 최고로 했다. 다른 것 했으면 난리가 날 뻔 했다"면서 뿌듯함을 보였다. 딸, 아들에 이어 손녀까지 그림을 그린다며 행복하다고 했다. 구순이 넘은 화가로서 자부심, '예술이란 무엇이냐'고 묻자 "웃기네!"라고 생뚱맞게 표현했다. 그는 "예술은 정말 '웃기다'"라면서 흰 그림처럼 공간을 떠도는 고독한 생각을 전했다. "웃기다는 것은 좋은 말입니다. 장난 아니다"라며 "그림은 참 신기한 거다"며 혼잣말처럼 되새겼다. "내 꿈이요? 아직도 재밌는 그림 많이 그리고 싶어요. 그림 그리는 게 가장 즐거워요." 전시는 7월16일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