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필름]오직 그들만의 추격전…'귀공자'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귀공자'는 박훈정 감독의 영화다. 연출자가 누구인지 새삼 확인하려는 건 아니다. 이 작품이 박 감독이 10여년 간 보여준 그만의 영화 유전자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작품이라는 말이다. 박 감독 영화의 유전자라는 건 이런 것들이다. 현실과 철저히 분리된 장르적 세계, 그 세계에서만 존재할 법한 과장된 캐릭터, 그런 캐릭터들이 지닌 폭력성, 바로 그 캐릭터와 폭력에 복무하는 듯한 스토리, 비장한 대사와 그 비장함에서 삐져나오는 이상한 코미디. '귀공자'엔 박 감독 영화의 이런 특색들이 빠짐 없이 있다. 이 '박훈정 영화'를 지지해온 관객이라면 '귀공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리 없다. 반대로 박 감독이 새로운 걸 보여주기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이번에도 만족하기 어려울 것이다. 귀공자로 불리는 정체불명의 킬러가 등장해 필리핀에서 사설 복싱 경기에 참가해 돈을 버는 청년 마르코를 난데 없이 쫓기 시작한다는 설정만 보면 '귀공자'는 꼬여 있는 이야기의 매듭이 하나 씩 풀려가는 재미가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전진하며 점차 드러나는 진실들은 그리 큰 충격을 주지 못한다. 대신 이 영화가 집중하는 건 캐릭터다. 완벽한 핏의 슈트를 입고 만면에 미소를 띈 채 사냥을 즐기는 듯한 귀공자와 역시 정장을 하고 있지만 귀공자와 달리 시종일관 얼굴을 찡그린 채 화를 내는 한 이사라는 두 무도한 인물이 맞부딪힐 때 발생하는 화학 작용을 지켜보는 게 '귀공자'의 핵심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다소 미적지근한 전반부를 지나 두 사람이 대면하는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극의 온도는 올라가기 시작한다. 귀공자와 한 이사 두 캐릭터가 중요한 영화인만큼 귀공자를 연기한 김선호, 한 이사를 맡은 김강우는 이 작품을 이루는 다른 어떤 요소들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김선호는 기존에 로맨스 드라마 남자 주인공 이미지가 생각나지 않는 연기를 하고, 김강우는 귀공자와 비교하면 활동 반경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인물인 한 이사를 맡아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해내는 저력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두 배우는 앞서 언급한 '박훈정 영화'에 딱 맞아떨어지는 연기를 한다. 다만 귀공자·한 이사 두 인물이 이런 종류의 장르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라는 건 '귀공자'의 한계다. 마르코를 연기한 강태주나 베일에 쌓인 또 다른 인물인 윤주를 맡은 고아라는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이 역시 연기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두 배우가 맡은 캐릭터의 문제로 봐야 한다. '귀공자'가 캐릭터에 골몰하면서 스토리가 빈약해져버린 건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이다. 물론 이 영화는 애초에 치밀하게 설계된 이야기 구조를 내세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 등장 인물들이 모두 달려들어 마르코를 쫓는 추격전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액션이 주는 재미, 흔히 말하는 장르적 즐거움에 집중하는 영화라는 얘기다. 그러나 얼렁뚱땅 넘어가는 경우가 잦은 탓에 생사를 넘나 들며 벌이는 그들의 사투에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고 긴장감도 떨어진다. 만약 박 감독이 '신세계'(2013) 이후 내놓은 영화들이 대체로 불만족스러웠던 관객이라면 '귀공자'에도 그때와 유사한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박 감독이 만드는 영화의 특색이라기보다는 고질적인 단점으로 봐야 한다. 박 감독은 최근 흔히 얘기하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가장 빠르게 만들어 가고 있는 국내 연출가 중 한 명이다. '마녀' 시리즈가 세계관을 점차 넓혀 가고, '귀공자' 후속작도 만들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 나올 '폭군' 역시 박 감독 유니버스 중 한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신세계'는 언제든지 다시 출발할 가능성을 지닌 작품이다. 이는 코로나 공백기를 빼면 2017년 '브이아이피' 이후 사실상 매년 새 영화를 내놓고 있는 박 감독의 성실성이 만들어낸 독보적인 성과다. 그리고 이 성실함은 국내 어떤 각본가·연출가도 흉내내기 힘든 유일무이한 능력이다. 그러나 박 감독의 이 속도전엔 디테일 부족이라는 부작용이 뒤따르는 게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감독은 이 방식을 버릴 생각이 없는 듯하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