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마지막이 된 개인전…연보라 오묘한 빛 '묘법' 아우라
'단색화 거장' 조현화랑 달맞이·해운대점서 11월12일까지반복 수행적 '묘법' 세계적 인기…후기 연필 '묘법' 최초 공개10월 소더비홍콩경매서 75년작 '묘법' 35억 낙찰 최고가 경신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마지막이 된 '단색화 거장' 박서보(1931~2023)개인전이 부산 조현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14일 갑작스럽게 타계해 미술계에 안타까움을 전한 故 박서보 화백의 오묘한 '묘법(描法) 세계관'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전시다. 조현화랑 달맞이와 해운대점은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세라믹 묘법 6점, 대형 판화 작품 4점을 포함하여 총 25점을 선보인다. 이 전시에는 2020년대를 기점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후기 연필 '묘법'도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 특히 이번 전시는 디지털로 고인의 묘법을 재해석한 비디오 작품이 선보인다. 1000호에 달하는 '연보라 묘법' 대작과 더불어 몰입감 있는 관객 참여형으로 전시된다. "1993년 LA아트페어에서 박서보 개인전 부스를 선보였는데 그때 미국에서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평론가들과 미술관장들이 보고 너무 좋은 작가라며 궁금해했습니다. 당시 LA에 있는 교포들이 많이 구입을 했어요"(조현화랑 조현 전 대표) 조현화랑은 1991년 박서보 작가의 첫 개인전으로 인연을 맺고, 이후 총 14번의 전시를 기획해왔다. 조현화랑은 "지난 1990년대 첫 박서보 전시를 열었는데 작품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막 싹트기 시작하던 부산에서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고 전했다. 이후, 1993년 LA 아트페어와 1996년 프랑스 FIAC 아트페어를 시작으로 해외무대에 작품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수행하듯 반복해서 선을 긋는 '묘법은 종이 대신 한지를 사용한 화면 안에 반복적인 선 긋는 행위를 통해 고도의 절제된 세계를 표현한다. '묘법'은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로 부상, 세계 미술계의 러브콜을 받았다. 1976년 작 ‘묘법 No. 37-75-76′이 2018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200만달러(약 25억원), 지난 5일 열린 홍콩 소더비경매에서 1975~1976년 작 '묘법 NO 37-75-76'이 2041만 홍콩달러(한화 약 35억원)에 팔려 최고가를 경신했다. 박 화백의 마지막이 된 이번 전시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묘법 시리즈를 지속해온 '박서보의 지치지 않는 수행의 결과물'을 진하게 전한다. 조현화랑 달맞이의 돌계단을 올라 커다란 철문을 열면 평소 전시실과는 사뭇 다른 어두운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넓이 5.5m, 높이 2.5m의 대형 스크린에 비치는 화면은 묘법의 강렬한 색감과 입체감 있는 질감을 초고해상도로 확대하여 움직임을 부여한 디지털 작품이다. 아주 작은 지점에서 시작되어 전체로 확장되면서, 평소 눈으로 관찰할 수 없었던 세밀한 디테일을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은 박서보 작가의 손자 박지환이 제작한 것으로, 아날로그 방식에 익숙하던 작가가 디지털 문명을 대면하며 느낀 공포심에 대한 돌파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색채가 다음 세대를 통해 디지털 화면으로 재해석된 의미가 크다.
1000호에 달하는 박서보의 연보라 묘법은 2010년에 제작된 것으로, 캔버스 표면에 올려져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내는 과정에서 눌리고 밀리면서 선과 색을 안으로 흡수하는 한지의 물성이 연보라색과 어우러져 비움을 통한 채움의 정신성을 묵묵히 발현한다. 전시는 화랑 내부의 계단을 통해 2층에서 이어진다. 고요한 푸른 색감으로 칠해진 커다란 전시 공간에는 박서보가 1986년 중단하였다가 최근 작업에 재개한 신작 연필 묘법 12점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밝은 파스텔 톤의 색감 위로 반복과 평행의 리듬감 있는 신체성을 드러내는 연필묘법에 대해 생전 박서보 화백은 “무목적성으로 무한 반복하며 나를 비우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캔버스 표면에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연필 묘법은 세살난 아들이 글씨 연습을 하면서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연필로 빗금을 치는 모습을 보고 체념을 떠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손에 한지가 닿을 때 그 방향을 바꿔서 진행하는 과정은, 묘법을 매일같이 그려오며 신체와 같이 익숙해 졌기에 비로소 가능한 작업이다. 오랜 시간의 수련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화폭에 담아 조율하는 '박서보의 묘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 없이 변화하며 확장되는 힘을 느끼게 한다.
지난 2월 SNS에 직접 폐암 투병 사실을 공개했던 그는 "내 나이 아흔둘… 작업에 전념하며 더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것"이라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박 화백은 지난 9월21일부터 23일까지 가족과 함께 부산을 방문하여 개인전이 열리는 조현화랑 전시장을 돌아봤다. 그는 SNS에 "하루 사이 바람의 결이 바뀌었다. 가을인가. 바닷바위에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도 사뭇 차가워지고. 내년에도 이 바람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이라고 쓴 글은 마지막 SNS 글이 됐다. 전시는 11월12일까지.
◆故 박서보 화백은? 한국미술의 전위적 흐름을 이끌며 단색화의 기수로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했던 화가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1년 경북 예천에 태어난 그의 작품은 광복 이후 탈식민지적 고민과 전후 국가 재건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단색화는 박서보 작가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 화백의 영향을 받은 소수의 회화가들이 당대 화단을 둘러싼 고집스러운 사상에 대한 반발이 일부 작용한 화풍으로, 1970년대 초 한국의 얼과 철학에 대한 작가의 급진적 해석과 서구 추상화의 간접 영향으로 탄생해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단색화는 러시아의 구성주의, 그린버그의 환원주의, 유럽의 제로, 일본의 모노하 (이우환이 이끌었던 전위미술)에 이르기까지 세계 주요 회화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찾아볼 수 있지만 비로소 본질적인 표현방식으로 구현된 것은 박서보의 손을 통해서였다. 일, 가족, 공동체, 국가라는 일상의 의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박서보의 실천은 물감, 기질, 손의 특이성에 바탕한 무한에 대한 명상이다.
고인은 홍익대 미대 학장과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79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84년 국민훈장 석류상, 1994년 옥관문화훈장, 1999년 자랑스러운 미술인상, 2011년 은관문화훈장, 2019년 대한민국예술원상, 2021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9년 비영리 재단법인 기지재단을 세웠다. 생전 랑앤 파운데이션, 화이트 큐브, 베니스 비엔날레, 삼성미술관 리움, 부산 시립미술관, 리버풀 테이트 갤러리,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등에서 전시했다. 작품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홍콩 M+ 미술관, 아부다비 구겐하임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도쿄 현대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