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 "'학전' 김민기 비범함 느꼈죠"…봉우리에 알알이 맺힌 아침이슬처럼
지난달 28일부터 14일까지 펼친 '학전, 어게인 콘서트' 성료"나 이제 가노라"…마지막 날 '아침이슬' 합창으로 마무리개관 33주년인 오늘 폐관…김민기 대표 병환·경영난"김민기 없는 학전은 학전이 아니다…학전답게 폐관""학전 정신은 계속 이어질 것"
14일 오후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 '학전, 어게인 콘서트' 마지막날에 출연한 배우 황정민은 학전의 정신적 지주인 김민기 대표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학전 독수리 5형제' 중 한명인 황정민은 '국제시장'(누적관객 1426만명) '서울의 봄'(누적관객 1312만명) 등 1000만 영화를 잇따라 내놓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그럼에도 그는 초심을 잃지 않는 배우로 유명하다. '리차드 3세' 등 연극에도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 '김민기 트리뷰트'로 꾸며진 이날 오후 3시 공연에 이어 오후 7시 공연에도 함께 한 황정민은 "20대 때 오롯이 열정만 가지고 했어요. 기술, 테크닉이 없었죠. 학전에서 제일 먼저 배운 건 '기본이 무엇인지'였어요. 그 때는 기본이 지겹고 '왜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죠. 그런데 지금은 제 자부심, 자존심 그리고 원동력이 됐다"고 강조했다. "덕분에 영화를 하면서도 허투루하지 않게 됐죠. 학전이 당장은 문을 닫지만, 그 정신은 이어질 것이라 믿기에 슬프지 않다"고 했다.
작년 김민기 대표 아들의 결혼식 관련 미담도 있다. 김 대표는 자신의 성격대로 이를 알리지 않았지만, 박학기는 김 대표 몰래 주변 몇몇에 이 소식을 전달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정민은 루마니아에서 영화 촬영 중에도 한달음에 달려와 식에 참석해 축하를 한 뒤 곧장 다시 돌아갔다. 박학기가 이날 이 얘기를 전달할 때 황정민은 공개하지 말아 달라며 극히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라는 내레이션이 인상적인 김민기의 대표곡 '봉우리' 음원을 배경으로, 젊은 배우가 끊임없이 걷는 영상으로 시작한 이날 공연은 학전 그리고 김민기 대표 그리고 그의 노래한 대한 헌사로 넘쳤다. 현재 암 투병 중인 김 대표의 쾌차를 비는 바람과 응원도 계속 이어졌다.
이번 '학전, 어게인 콘서트'를 기획한 총감독이기도 한 박학기는 이날 '친구'를 불렀다. 김민기 대표가 고등학교 캠핑 때 후배가 익사한 뒤 그 소식을 친구의 부모에게 전달하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만든 곡으로 심연이 깊다. 박학기는 김 대표의 곡이지만 그가 만든 노래로 잘 알려지지 '가을 편지'도 불렀다. 한영애는 특유의 전달력으로 내레이션과 함께 '봉우리'를 들려줬다. 인간의 목소리를 닮은 첼로가 주제 선율을 연주하며 곡의 정서를 끌어올렸다. 그는 "김민기 선배님이 훌훌 털고 일어나기를 간곡히 바란다"며 '내 나라 내 겨레'도 들려줬다.
알리, 정동화 등 학전과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가요계 후배들도 이날 힘을 실었다. 듀오 '유리상자' 게스트로 학전 무대에 선 적이 있다는 알리는 '바다' '백구' '상록수'를 불렀다. 선배 뮤지션들의 노래를 자주 재해석하는 알리는 "왜 자기노래는 부르지 않냐고 묻는 분들이 계시는데, 서운하거나 아프지 않아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죠. 우리 대중음악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2022년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아침이슬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열린 '리사운드 코리안팝' 무대에 함께 한 정동하는 '천리길' '새벽길'을 들려줬다. 그는 "김민기 선생님 노래엔 알 수 없는 힘이 있어 씩씩하게 부르게 된다"고 했다. 이날 공연 마지막엔 출연진들이 다 같이 나와 김민기 대표의 '아침이슬'을 합창했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학전의 현 상황을 은유하는 듯했다. 객석에서도 눈물 훔치는 소리와 함께 조용한 떼창이 흘러나왔다. 박학기는 "김민기 선배님이 강한 힘으로 잘 이겨내실 것이라 믿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달 28일 시작해 20회 공연을 소화한 '학전, 어게인 콘서트'는 하나의 현상이 됐다. 개관 33주년을 꼭 맞는 15일 폐관하는 학전을 보내기 위한 일종의 장례였지만 동시에 학전을 기억하면서 다 같이 어우러지는 축제였다. 회당 150명 넘게 몰렸고, 릴레이 콘서트 기간 3000명이 넘는 관객이 다녀갔다. 이들 관객은 선택받은 자들이다. 아이돌 콘서트 티켓 예매를 방불케하는 티케팅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티켓은 예매를 시작하자마자 단숨에 매진됐다. 여행스케치, 윤도현 위드(with) YB 허준 무대를 시작으로 크라잉넛, 웅산밴드, 노찾사, 동물원, 김필, 이한철밴드, 박창근, 박학기, 시인과 촌장, 루시, 오존, 권진원, 유리상자, 다섯손가락 이두헌, 데이브레이크, 알리, 하림, 자전거탄풍경, 장필순, 김현철, 한상원밴드, 한동준, 윤종신, 김재환, 왁스, 배우 이정은 등이 함께 했다. 유재하 동문회, 김광석 다시 부르기 같은 프로젝트성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배우 데이엔 '지하철 1호선' 초연 멤버들인 '조상님' 방은진·설경구 그리고 장현성 등이 출연했다. 배우, 뮤지션들 뿐 아니라 총연출을 맡은 조경식 HK엔터프로 이사, 학전의 안살림을 책임져온 김성민 총무팀장 등 스태프들의 노고도 컸다.
학전의 마지막 공연날 다양한 사연을 지닌 관객들이 객석에 앉아 있었다. 이날 경품 추첨에서 황정민과 사진찍는 이벤트에 뽑힌 수도권에 사는 50대 김 모씨는 이날 학전을 처음 찾았다고 했다. "어릴 때 지방에 살아서 학전은 일종의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폐관한다는 소식을 듣고 꼭 와보고 싶었다"고 했다. 20대 초반 대학생인 김주원 씨도 이날 학전에 처음 와 봤다. 여러 영화를 보고 황정민의 팬이 됐다는 그녀는 "학전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소중한 공간이라는 절실히 느꼈고 사라지게 돼 정말 아쉽다"고 했다. 사정상 '학전, 어게인 콘서트'에 참석하지 못해도 다양한 자리에서 학전을 기억하고 투병 중인 김민기 대표의 쾌차를 빌었다. 학전 독수리 5형제 중 또 다른 한명인 조승우는 지난 1월 '제8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시상식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뒤 "이 상과 모든 영광을 학전과 김민기 선생님께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1991년 3월15일 대학로에 학전 소극장을 개관하면서 출발한 학전(學田)은 한자로 '배울 학(學)'에 '밭 전(田)' 자를 쓴다. 일종의 못자리 농사라는 뜻이다. 문화예술계 인재를 촘촘하게 키우되 큰 바닥에서 추수를 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일종의 인재 사관학교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김광석, YB 윤도현을 비롯한 수많은 뮤지션들, 황정민·설경구·김윤석·장현성·조승우 같은 영화계 버팀목이 된 '독수리 5형제'가 탄생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한국대중문화사에 크고 작은 궤적을 만들어 왔다. 33년간 총 359개 작품을 기획·제작해오면서 수많은 공연예술인들의 성장 터전이자 수많은 관객들의 삶 속에 함께 해왔다.
이외에도 '모스키토', '의형제', '개똥이' 등 우리의 정서와 노랫말이 살아 숨 쉬는 뮤지컬도 선보였다. 2004년부터는 학전 어린이 무대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복서와 소년', '아빠 얼굴 예쁘네요' 등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공연에 집중했다. 김민기는 대학로 아동·어린이극 지킴이로도 통했다. 그러다 지난해 10월 경영난과 김민기 대표의 병환으로 학전블루 소극장 운영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소식을 접한 예술인들이 자발적으로 '학전, 어게인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학전의 사정이 외부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정부 등이 학전을 운영하는 방안 등이 검토됐으나 학전은 김민기 없는 학전은 없다며 학전답게 폐관을 결정했다. 김민기는 학전을 통해 "모두다 그저 감사하다,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해당 공간을 임차해 학전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별도 공간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신진 예술가 등용문 등의 용도를 고민 중이다. 오는 7월 재개관 예정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