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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필름] 이 토네이도엔 미나리 향기가 '트위스터스'

등록 2024-08-14 06:02:00   최종수정 2024-08-16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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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영화 '미나리'(2020)는 200만 달러로 만든 작품이었다. 미국 독립영화 중에서도 가장 작은 규모였다. 정이삭 감독이 '미나리' 이후 처음 내놓은 영화 '트위스터스' 제작비는 약 2억 달(약 2740억원)다. 지난해 최고 흥행작이었던 '바비'(총 매출액 14억4560만 달러)를 만드는 데 쓴 돈이 2억 달러 정도였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중에서도 큰 규모에 들어간다는 얘기다. 100배 늘어난 제작비는 정 감독이 전작과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었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은 백인 여성과 백인 남성, 소재는 가장 미국적인 재난인 토네이도. 이렇게만 보면 한국인 이민자의 애환을 담아내며 구원에 관해 묻던 소수 인종 출신 감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다. 그러면 '트위스터스'엔 우리가 알던 정이삭이 정말 없는 걸까. 일단 이 정도로 말해야 할 것 같다. 그의 영화는 그야말로 많이 변했지만, 완전히 변해버린 건 아니라고.

'트위스터스'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재난영화인 '트위스터'(1996)를 계승한다. '트위스터'는 전 세계에서 4억945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인디펜던스 데이'(8억1740만 달러)에 이어 그 해 흥행 2위에 오른 히트작. 두 작품 모두 이른바 토네이도 체이서(Tornado Chaser)들이 등장해 거대하고 위력적인 자연 현상에 맞선다는 얼개가 유사하다. 차이는 그들이 이 천재지변에 홀린 듯 따라가 무엇을 하느냐다. '트위스터'가 토네이도를 예측해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면, '트위스터스'는 예측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토네이도를 멈추려는 이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래서 토네이도를 오락으로 소비하는 유튜버 타일러(글렌 파월)나 토네이도 예측을 통한 부동산 사업에 힘을 보태고 있는 하비(앤서니 라모스)가 아니라 토네이도 문제에 직접 손을 대 해결하려 하는 케이트(데이지 에드가 존스)가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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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트위스터스'는 할리우드식(式) 재난영화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특별한 재능과 열정을 가진 주인공, 도전적인 일을 하다가 동료를 잃은 과거, 함께 살아남은 옛 동료와 재회, 다시 시작하게 된 그 일, 극복하기 쉽지 않은 과거의 상처와 그로 인한 두려움, 정반대 성격을 가진 인물과 새로운 만남, 도전과 극복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관객이 숱한 할리우드 영화 혹은 할리우드 영화를 답습한 수많은 한국영화에서 봐온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트위스터스'는 선명한 캐릭터, 논리와 리듬을 함께 갖춘 편집, 쉬우면서도 수긍할 수 있는 서사의 굴곡을 만들어내며 재난 블록버스터의 구태를 돌파하는 데 일정 부분 성공한다. 러닝타임은 122분으로 짧지 않지만 워낙에 신(scene)을 낭비하지 않고 전진하기에 어느 구간에서도 최소한 지루하다는 인상은 주지 않는다.

2억 달러를 쏟아부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는 스펙터클과 그 스펙터클이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박진감은 '트위스터스'의 최대 무기다. 크게는 세 번의 대형 토네이도, 그 사이에도 수 차례 반복해 폭풍을 보여주는데도 물린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건 이 작품이 그 표현 방식을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민한만큼 얼마나 다채롭게 표현했는지 알게 한다. 오클라호마 평원 위를 누비는 무자비한 악당으로 토네이도를 의인화해 캐릭터를 부여한 것 역시 인상적이다. 저 멀리서 거대한 말을 타고 등장해 순식간에 마을을 휩쓸어 버리고 지나가는 듯한 그 모습은 마치 서부의 무법자 같다. '트위스터스'의 시각 효과는 소리를 통해 극대화된다. 토네이도가 불어 닥쳐 스크린 밖 관객마저 날려버릴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건 잘 찍었기 때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잘 들려준 덕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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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적당히 잘 버무려져 특별할 것 없는 재난 블록버스터로 보이지만, '트위스터스'는 정 감독의 DNA를 이식 받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도약한다. 이민자이자 개척자로서 미지의 땅에 도전하는 제이콥 가족이나 과학적으로 온전히 분석되지 않는 미지의 존재인 토네이도를 길들이기 위해 몸을 던진 케이트 일행은 어쩌면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나리'에서 제이콥 가족의 고난이 관객에게 오락이 될 수 없는 것처럼 '트위스터스'는 토네이도가 자아내는 흥분을 역시나 오락을 위해서만 전시하지 않음으로써 거대 자본이 투입된 이 작품에 최소한의 인간미를 불어넣는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타일러나 하비가 아니라 케이트가 극을 이끌어 갈 수밖에 없고, 타일러와 하비가 결국 케이트의 목표를 인정하고 그 일에 합류하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재난을 볼거리로만 제공하는 건 아니라는 걸 뜻한다.

말하자면 '트위스터스'의 스펙터클엔 겸손이 있다. 이 작품의 인간적 면모는 케이트의 과거사를 통해 드러나는 게 아니라 케이트를 비롯한 등장 인물들이 개인의 욕망보다 공공선을 위해 연대하며 타인을 돕고자 하는 현재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그래서 케이트·타일러·하비 등 추격자들은 토네이도에 의한 인명 피해가 확실시 될 땐 어떤 망설임도 없이 기꺼이 민간 자원 봉사자가 된다.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뒤 폐허가 된 마을을 여러 차례 비추는 것 역시 '트위스터스'가 가진 가치를 분명히 하는 장면이다. 요컨대 정 감독은 토네이도에 휩쓸리듯 돈에 쓸려가버리는 게 아니라 돈의 힘을 빌리면서도 반드시 지켜내야 할 최소한의 철학을 잃지 않는 데 성공, 주류 영화계에 발을 디디면서 동시에 생존 신고를 한다. 그렇다면 많이 변했지만 완전히 변해버리지 않았다는 말은 정 감독의 다음 영화를 더 기대하게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될 것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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