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태 '동시적 풍경'…추구미는 '화이부동'[박현주 아트클럽]
가나아트센터서 5년 만의 개인전Space 97-공예관서 회화오브제 40점 전시'말과 글' 새 시리즈→ ‘우연과 필연’ 최초 공개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림이 조각이 되고, 조각이 그림이 되는 작품. 유선태 작가는 이를 두고 ‘동시적인 풍경’이라고 표현했다. 상반된 개념, 자연과 오브제를 한 화면에 배치하는 ‘동시적 풍경’의 '추구미'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상태다. 두 요소 간의 순환과 조화를 이루는 작업 세계다. “나의 작품에 있어서 풍경은 대략 세 가지 범주로 분류된다. …불변(不變)하는 것, 변화(變化)하는 것, 그리고 둘 사이의 중간적인 상황이다. 첫째로 내가 불변하는 것으로 규정짓는 풍경은 자연과 같은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놓여 진 풍경이다. 둘째로 변화하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 자연과 대립되는 상황으로 이루어진 일시적인 풍경들이며, 셋째로 그 중간의 영역에 속하는 상황은 이 두 가지 영역을 재구성하거나 재조합 혹은 변형하여 이루어진 풍경들이다. 세번째 상황의 풍경에서는 첫번째와 두번째 풍경의 적절한 긴장과 공존이 동시에 가능하다.”(유선태) 유선태의 '동시적인 풍경'은 크게 '말과 글'과 '문'에서 나타나며, 이번 전시에서 두 시리즈 모두 감상할 수 있다. 2006년 시작된 '말과 글'은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저서 『말(Les Mots)』에서 영감을 받아 이름 지어진 것으로 작가가 우연히 본 창밖 풍경에서 출발했다. "작업을 하던 어느 날 앞뜰의 나무 주위에 나뭇잎이 가득 떨어진 모습을 보았는데 이때 나무에 달린 잎은 '말', 떨어져 낙엽이 된 잎은 '글씨'와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잎이 떨어져 거름이 되고 다시 새잎이 돋아나는 것처럼 '말은 글이 되고 글은 다시 말이 된다는 느낌. 이러한 발견 후 말과 글의 관계처럼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을 찾아서 작품으로 옮겼지요."
'말과 글' 시리즈에는 대표적으로 책이 들어있다. 책은 인쇄 활자, 즉 글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초기 '말과 글'에서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책은 자연과 가장 대비되는 오브제다. 인간의 곁에 오랫동안 존재하면서 인간에 대한 것들을 기록한 문명의 결과가 책이다. 작품에는 침묵하는 듯이 닫혀 있거나, 때로는 활짝 펼쳐진 채로 날개 단 듯 부유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신작에도 수십 권의 책이 차곡차곡 쌓여 마치 개선문처럼 하나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작가는 "스스로 존재하여 우연적인 자연과 달리 책은 필연적"이라며 "이 작품을 '말과 글', 그 중에서도 ‘우연과 필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각각 우연과 필연을 상징하는 자연과 책을 하나의 화면에서 다룸으로써 약간의 긴장을 만드는데, 이와 동시에 책과 자연은 모두 인간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책을 통해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하나의 문처럼 쌓여 있는 책의 기둥들 사이로 자연의 풍경이 보이고 그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통과하며 자연으로 향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은 두 대상 간의 조화를 이루려는 표현이다. " "애초에 예술이란 것도 인간이 규정한 것일 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드러냄과 표현만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기성의 관념이나 위계, 범주를 거부하는 작가의 태도가 작업에서 엿보인다.
유선태는 오브제에 풍경을 덧그리기도 한다. 푸른 하늘과 숲이 울창한 풍경이 그려진 첼로, 세계지도 대신 단풍으로 물든 산이 그려진 지구본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전 골동품 오브제를 껴 놓은 작품은 너무 장식적이어서 흠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당당했다. "오브제를 보는 순간 작품이 떠오른다. 나는 뼈 속까지 장식적"이라며 "프랑스 유학시절 벼룩시장에 만난 '골동품'이 작품의 영감이 됐다"고 했다. (골동품)오브제는 '멈추지 않는 시간을 도입한 것"이라는 것. 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 '말과 글'의 ‘온실 시리즈’도 첫 선을 보였다. 자신만의 아뜰리에를 꿈꾸며 ‘나의 아뜰리에’ 시리즈를 그렸던 유선태는 그 희망대로 독립적인 아뜰리에를 갖게 되었고, 이제는 나만의 온실을 상상하며 그림을 그린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화폭 속 온실을 꾸미는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온실 속 풍경은 바깥의 진짜 자연이 만드는 풍경과 함께 제시됩니다. 마찬가지로 동시적인 이 풍경은 나만의 작은 자연을 가꾸며 자연에 대한 갈망을 잃지 않는 상황과 그럼에도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즐기지 못하는 현대인의 아이러니를 담았습니다."
시공간을 오가는 작품은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뫼비우스띠처럼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자연과 건축, 외부와 내부, 순간과 영원, 말과 글, 오브제와 자연물 등이 하나로 엮어진다. 자전거를 탄 작가의 모습은 가로 막힌 것처럼 보이는 두 대상을 오가며, 소녀상이 보고 있는 거울에는 소녀의 얼굴이 아닌 풍경이 비쳐 입체와 평면의 순환이 이뤄졌음이 드러난다. 하나의 풍경에서 또 다른 풍경이 생성되고 중첩되는 건 그의 '쌍둥이 기질'이 담겼다. 본능적으로 또 다른 하나를 항상 생각한다는 그는 화가로, 형은 의사로 살고 있다. 오브제와 그림이 분별이 없는 작품은 마치 입체화 같은 환영에 빠지게 한다. 화려한 색채와 정면승부한 자신감, 식물을 화폭에 부활시킨듯한 붓질의 정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찰나의 순간을 찬란하게 빚는 예술가로서 '끊임없는 호기심'이 식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전시는 30일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