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친박도 돌아섰다
헌정 사상 두번째로 국회를 통과한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정세균 국회의장의 결재를 거쳐 새누리당 소속 권성동 법제사법위원장에게 송달된다. 또 소추안 등본은 각각 헌법재판소와 피소추자인 박 대통령에게 송달되는데, 박 대통령이 등본을 송달받는 순간 대통령으로서의 권한 행사는 정지된다. 한편 권 위원장은 국회의장으로부터 송달 받은 정본을 헌법재판소에 접수한다. 정본이 접수된 직후부터 헌법재판소의 본격적인 탄핵심판절차가 시작된다. 헌법재판소는 최장 180일 이내에 탄핵소추안에 대해 기각 또는 인용을 선고해야 한다. 다만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임기가 내년 1월31일 만료되는 만큼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결과는 내년 1월말 전에 나올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헌법재판소의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 그러나 황 총리 대행 체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야당 쪽에서 신임 국무총리 인선을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야당이 박 대통령에 이어 황 총리에 대한 탄핵소추를 추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경우 경제부총리가 권한대행 바통을 이어 받는다. 한편 권한이 정지된 박 대통령은 향후 관저에 머물며 헌법재판소 결정을 기다릴 예정이다.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탄핵소추안에 대해 인용 결정을 내릴 경우 박 대통령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탄핵된 대통령'이 된다. 이 경우 박 대통령은 불명예 퇴진하는 건 물론이고 대통령으로서의 불소추 특권도 상실하게 된다. 최악의 경우 특검이 진행하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수사 과정에서 구속될 가능성도 있다.
◇새누리 의원 최소 62명 동참 이날 234표의 압도적인 탄핵안 찬성은 야권과 새누리당 비박계를 뛰어 넘어 친박계 조차 탄핵 가결로 돌아선 결과다. 야당 및 무소속(더불어민주당 121·국민의당 38·정의당 6·무소속 7) 172명이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고 보면 새누리당에서 62명이 대통령 탄핵에 동참한 것으로 계산된다. 당초 새누리당 비박계 모임인 비상시국회의는 이날 오전 최종 회동을 갖고 참석 인원 33인 전원이 탄핵 가결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인사들 중 10명의 의원들은 탄핵에 찬성하겠다고 공개적인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여기에 비례대표 신보라 의원도 SNS에 탄핵 찬성 표를 던지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신 의원까지 합하면 탄핵 표결 전 찬성을 공언한 새누리당 의원은 모두 44명이었다. 이 인원 외에 드러나지 않은 친박계 18명이 탄핵안에 찬성표를 던진 셈이다. 이미 표결 전부터 친박계에서는 이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박계 의원들은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공공연히 친박계 의원 일부가 자신에게 탄핵 찬성 입장을 밝혔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쨌든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9일 국회에서 가결됨으로써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서, 또 현재의 대통령으로서 오랜 기간 생활했던 청와대 관저에서 사실상 유폐 생활을 하는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됐다.
박 대통령은 6·25전쟁 중인 1952년 2월2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육군 소령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교사 출신인 육영수 여사의 2녀1남 중 장녀였다.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은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1963년 2월에는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청와대에 입성했다. 이때부터 박 대통령은 영애(令愛)로 18년간을 청와대에서 지냈다. 모범생이었던 그는 성심여중·고교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고 서강대 전자공학과(70학번)를 이공학부 수석으로 졸업했다. 서강대를 졸업한 뒤 1974년 2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교수가 되는 것을 꿈꿨다. 그러나 1974년 광복절 경축행사장에서 모친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암살당하자 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22세였던 그는 퍼스트레이디 대행 역으로 활동하며 모친의 빈자리를 채웠다. 그러던 1979년 10월26일에는 부친 박 전 대통령마저 안가에서 만찬 도중 자신의 심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서거했다. 그는 10·26 이후 1개월 만에 두 동생과 함께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이후 18년간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했다. 방송 등 언론에서는 일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육영재단 이사장, 영남대 재단 이사장, 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며 부친의 명예회복을 꾀했지만 공개적인 활동은 거의 자제했다. 박 대통령이 정치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7년부터였다. 1997년 12월 대선을 8일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을 하고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 후보의 패배로 정권은 교체됐고 한나라당은 야당이 됐다.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부총재 시절이던 2002년 2월 이회창 총재가 자신이 내놓은 '총재직 폐지, 당권·대권 분리' 등 당 개혁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며 탈당을 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2002년 5월에는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과 단독 면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 총재가 개혁안을 대폭 수용하자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으로 재합류했다.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여당 후보인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역설적으로 박 대통령에게 기회가 왔다. 이후 차떼기 사건 수사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까지 겹치며 한나라당이 최악의 위기 상황에 빠진 것이다. 결국 2004년 4월 총선을 앞둔 3월 전당대회에서 박 대통령은 당 대표로 뽑혀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천막당사 설치, 천안 연수원 매각 등 승부수를 띄운 끝에 121석을 얻어 개헌 저지선을 확보했다. 그 공을 인정 받아 박 대통령은 단숨에 유력 대선주자 반열에 오르게 됐다. 이후 대표 재임 2년3개월 동안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40대 0'의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던 2006년 5월20일에는 서울 신촌로터리 지방선거 유세 도중 오른쪽 뺨 11㎝가 찢기는 테러를 당했다. 그럼에도 병원에서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어보는 등 자신의 몸보다 당을 먼저 생각한다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며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그러자 정당 사상 유례가 없는 개인의 이름을 쓴 '친박연대'가 등장했다. 이때 박 대통령은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살아서 돌아오라" 등 발언을 하며 이들을 간접 지원했다. 와신상담한 박 대통령은 2011년 말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선 패배,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위기에 빠지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다시 당의 전면에 등장했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며 개혁에 착수했고 2012년 4월 총선에서 야권연대로 맞선 민주통합당을 누르고 과반의석(152석) 확보에 성공했다. 이어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선 84%라는 압도적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며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됐다. 이후 그는 같은 해 12월 대선에서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청와대를 떠난 지 34년 만에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의 자격으로 청와대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탄생이자 최초의 부녀 대통령이란 타이틀까지 얻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임기 4년차인 올해 오래 인연을 맺어온 최순실과 그 일가의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리면서 결국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탄핵을 당하는 처지가 됐다. 9~22세까지 13년간은 국가 최고지도자의 딸인 영애로, 22~27세의 5년간은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28~46세는 은둔생활로, 46~60세에는 새누리당 의원(5선)으로, 61~64세는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으로 지낸 박 대통령의 드라마틱한 인생유전이 참담한 결말로 끝나고 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