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선언 이면엔 전두환의 정권 재창출 계산"
"6·29선언은 기획 상품···각본·감독에 전두환, 주연은 노태우" "6·29로 항쟁 갑작스럽게 종결···이후 '불완전한 민주화'로 귀결" 【서울=뉴시스】박준호 기자 = 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로 꼽히는 6·29선언의 이면에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정권 재창출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정일준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8일까지 이틀 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주최한 6월 항쟁 3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에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지배블록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 데는 나름대로 직선제를 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계산이 있었던 것"이라며 이같이 주장했다. 정 교수는 전두환 정권이 직선제 개헌이라는 양보를 하게 된 이유로 경찰력만으로는 시위 진압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군대 동원에 실패한 점, 직선제 개헌이라는 타협이 집권당으로서 차악으로 고려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제도권 야당이 6·29선언을 받아들인 이유로는 제도권 야당과 사회운동세력에 의한 6월항쟁이 전두환 정권을 타도·전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인 것으로 정 교수는 해석했다. 이어 "이러한 타협안은 물론 민주화를 요구한 국민의 참여와 요구에 밀려서 나온 것이었으나 제한된 민주화를 통해 집권세력의 지배를 지속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며 "민주주의 절차를 보장해 국민저항을 약화시키고 저항세력을 분열시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고 분석했다. 양김(김대중·김영삼)의 뿌리 깊은 경쟁이 지속되는 한 정부·여당의 막강한 자금·조직으로 대통령 직선 경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거리의 정치는 제도권으로 들어가게 됐고, 민주화를 향한 권력투쟁은 제도권 안에서의 선거경쟁으로 변화했다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정 교수는 "야당의 지도자인 김대중과 김영삼이 동시에 출마한다면 집권 여당이 누리고 있는 엄청난 프리미엄으로 분할된 민주화연합의 표를 누르고 승리할 수 있다는 전략적 계산이 가능했다"며 "6·29선언의 내용에 김대중의 사면 복권이 포함된 것은 이러한 전략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전 대통령이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게 직선제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하며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포함한 8개항의 특별선언을 지시한 사실은 최근 '전두환 회고록'에도 실린 바 있다. 정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 없는 국가안보'를 추구한 데 비해 전 전 대통령은 어쨌든 '민주주의를 무시할 수 없는 국가안보'를 추구해야 했다"며 "박 전 대통령은 집권기간 내내 집권당(공화당)을 약화시키면서 후계자가 대두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한 반면, 전 전 대통령은 쿠데타 동지인 노태우 대표를 일찌감치 전역시켜 다양한 공직을 섭렵하면서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 나름대로 문민화(civilianizing)의 수순을 밟은 셈이다"고 두 대통령의 후계관리 차이점을 비교했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군(軍)에서 전역한 다음 정무 제2장관, 체육부장관, 내무부장관, 서울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조직위원장 등을 거쳐 전국구 의원으로서 민정당 대표 자리까지 오르며 꾸준한 '경력관리'를 받았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6·29선언에 대해 "일종의 기획 상품이며 각본과 감독에 전두환, 주연은 노태우였다. 노 대표는 발표만 했을 뿐이지만 모든 공은 노 대표에게 돌아가게 만들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전 정권의 치밀한 각본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는 6월 민주항쟁으로 얻어낸 귀한 결과물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럼에도 정 교수는 "6월항쟁은 6·29선언에 의해 갑작스럽게 종결됨으로써 이후의 민주화가 '불완전한 민주화'로 귀결되는 한계를 안게 됐다"면서 "또 정치적 민주화에 몰두해 사회경제적 민주화라는 과제를 소홀히 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