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라이징Biz리더]박미경 포시에스 대표 "리포팅솔루션의 국산화...3번의 데스밸리 극복 비결"
【서울=뉴시스】김진아 기자 = 아내가 기술을, 남편이 영업을 맡았다. AS를 직원 한 명에 경리를 맡아줄 여직원, 이렇게 넷이 모여 시작한 것이 '포시에스' 첫 장이었다. '딱 4명, 그게 다였다'라고 말문을 연 박미경 대표가 이끄는 포시에스는 '웹기반 리프팅 솔루션'의 국산화를 이끈 기업이다. 1995년 3년차 직장인 부부는, 결혼을 하기 전 회사부터 먼저 세웠다. 세 번의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견뎌낸 포시에스는 종이를 대체할 리포팅시스템을 개발했다. "우리 남편이 영업을 좀 잘했죠"라며 말문을 연 박미경 대표는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체 제품을 가져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IMF와 IT버블의 붕괴, 매출 정체까지 삼박자를 고루 겪어 온 그의 말 속에는 뼈가 있었다. 박 대표는 "창업 당시에는 외산 소프트웨어 판매와 기술지원을 했어요. 그때만해도 외산 소프트웨어가 압도적이었죠. 그런데 국내 시장에서 반응을 따라 회사가 휘청휘청 하는 거에요. 그렇다고 저희 제품이 아니니 업그레이드를 할 수도 없고 기업하는데 발목이 되겠구나 싶었어요"라고 회상했다. 전자계산학과, 이제는 컴퓨터공학으로 불리는 공학도로서 박 대표는 '개발도 못할 게 뭐가 있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뚝딱 만들어 냈다. 그는 "그때는 제가 고객지원도 하니, 니즈를 파악하고 국산 솔루션을 만들었죠. 우리 잘난 남편이 그걸 참 잘 팔았어요"라며 웃어보였다. 그 첫 작(作)인 '오즈이폼'(OZ e-Form) 히트를 쳤다. 박 대표는 지금도 남편과 '전략은 없었지만 전략적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고 했다. 국산 제품의 수요가 가득한 상태에서 필요한 제품을 내놨으니 팔릴 수 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포시에스에 신생기업이 머리를 싸매는 '판로'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2000년대 전자정부 기조에 힘입어 포시에스는 대법원과 국세청, 행정안전부 등 수많은 정부기관의 시스템 구축을 도맡게 됐다. 가족관계증명서 양식이 대표적인 예다. 국산 시장을 형성했다는 의미는 곧 시장의 1위 기업이라는 의미다. 경쟁사들이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 포시에스의 독주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비가 찾아왔다. 1995년 설립 후 3년 만에 맞은 IMF는 자체 제품 오즈이폼의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에 힘입어 회사는 2002년 코스닥 상장에 성공하지만, 이내 IT버블이 붕괴되는 시기를 맞았다. 박 대표는 "회사 매출의 절반을 차지했던 외산 제품이 시장에서 죽었어요. 국내 시장이 덩치가 큰 시스템관리솔루션에서 포인트 솔루션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던 때였죠. 살기는 살았지만 매출은 반토막 난 상태였죠. 고객은 매년 늘었는데 이제 경쟁제품이 밀고 들어와 가격은 반토막이 났다"고 했다.
박 대표는 "기업자원관리(ERP) 시스템의 도입은 익숙치 않아 시간은 좀 걸렸지만, 영업과 이에 따른 비용 등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효율이 엄청나게 오르는 거에요. 영업이익률은 20~30%였죠. 정말 잘 될 때는 40%까지도 기록했어요"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이러한 '시스템'적인 관리가 기업 경영에 관건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시스템이 없는 기업들은 사장님들이 중간에 보고만 받고 대부분 정리를 4분기(10~12월) 때 합니다. 대응을 할 수가 없죠. 저는 지금도 매주 신규 프로젝트가 어디에 등록됐는지를 봐요. 정리를 한다는 것은 모든 투입비용을 알 수 있는것"이라고 설명했다. 2009년부터 가시화 된 시스템 정착효과는 이후 기업을 우상향 흐름에 편승시켰다. 2010년 매출 100억원을 돌파한 포시에스는 점차 진화된 리포팅 솔루션을 내놓으며 안정적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회사는 엔터프라이즈 리포팅 솔루션인 OZ 리포트와 전자문서 개발 솔루션 OZ e-폼, 클라우드 기반의 전자문서 서비스 e폼사인 등을 개발하며 지난해 매출 180억원을 찍었다. 직전 해인 2017년 매출이 128억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괄목할만한 성과다. 포시에스의 과제는 더 이상 국내에 머물러 있지 않다. 박 대표는 "국내 시장은 고작해야 200억~300억원에 그친다"며 해외 진출에서 답을 찾고 있다. 회사는 2014년 일본, 2015년 싱가포르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박 대표는 "지금까지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는 없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엔지니어로서 전략없는 전략가로 회사를 일구어 온 박 대표는 최근 임기를 시작한 한국여성벤처협회장의 역할에 대해서는 겸손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제 자신이 정부의 도움을 빌어 기업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아 회원사들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려울 수 있어요. 하지만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 '잘' 듣는 것이 저의 장점이에요. 여성 벤처기업들의 고충을 충분히 듣고 이해하고 전달해야죠"라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