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종 문화소통]훈민정음 ‘ㆆ’을 알아야 ‘ㅇ’을 알 수 있다
박대종의 ‘문화소통’
‘ㆆ’은 세종이 세운 훈민정음 왕국의 집현전 8학자 중 최항이 1474년에, 신숙주가 1475년에, 정인지가 1478년에 사망(성종 재위: 1469∼1494) 후, 연산군을 거쳐 중종 때 해례본을 본 적 없는 최세진의 ‘훈몽자회’ 이래 우리말 표기 체계에서 삭제됐다. ‘ㆆ’의 소릿값은 ‘ㅇ’과 유사하여 서로 긴밀히 연결돼있어, ‘ㆆ’을 모를 경우 ‘ㅇ’도 모르게 돼있다. 주시경 이래 ‘ㅇ’에 대해 국어사전들에서 “음가(音價)가 없다”라 하고, 중국 바이두 백과사전에서 ‘장식용’이라 소개하고 있음이 그 증거다. 주시경의 논리대로 초성 ‘ㅇ’이 음가 없는 장식용이라면, ‘ㆆ’ 또한 아무런 음가 없는 장식용 글자가 되고 만다. 본래 후음 초성 ‘ㅇ’과 ‘ㆆ’의 음가를 구별한 것은 세종대왕이 최초가 아니다. 중국 당나라 말엽 승려 수온(守温)이 전해 내려오는 사항들과 범어 자모에서 힌트를 얻어 30개의 자모를 창제했는데, 그 안에 ‘ㅇ’의 ‘喻(유)’모와 ‘ㆆ’의 ‘影(영)’모가 이미 있었다. 수온의 30자모는 송나라 때 36자모로 확대됐다가, 명나라 홍무정운에서는 31자모로 조정됐다. 그에 비해 세종의 조사 결과, 우리나라의 어음은 ‘ㅇ’과 ‘ㆆ’을 포함한 23자모(초성17자 + 전탁6자)였다. 성운학과 음률에 정통한 세종께서는 ‘ㆆ’과 ‘ㅇ’의 소릿값이 비슷한 관계로 백성들이 구별하여 적기에는 어렵고 불편할 것이라 여겼다. 그렇더라도 조선의 국문은 중국과 같은 한문이고, 우리말의 70% 이상은 한자어인 상황이었다. 당시 중국 조정에선 지금과 달리 ‘影母(ㆆ)’를 ‘喩母(ㅇ)’와 구별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우리말 한자음을 표기할 때는 원칙대로 ‘ㆆ’과 ‘ㅇ’을 바르게 구별하여 적되, 우리말 토속어=언어(諺語)의 경우엔 ‘ㆆ’을 ‘ㅇ’으로 적어도 되게끔 융통적인 조치를 취했다. 훈민정음해례 합자해의 “초성의 ‘ㆆ’은 ‘ㅇ’과 서로 비슷해서 토속어에선 통용할 수 있다(初聲之ㆆ與ㅇ相似, 於諺可以通用也)”가 바로 그것이다. 토속어 초성에서의 이러한 통용 조치는, 실제론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서적들에서 보듯 오직 ‘ㅇ’으로만 적는 것으로 통일됐다. 그러던 게 중종 때에 둘의 차이를 알지 못한 최세진에 의해 ‘ㆆ’이 삭제됐고, 그 이래 우리나라 한자음 표기조차도 ‘ㆆ’ 소리는 오직 ‘ㅇ’으로만 표기됐다. 그렇더라도 1940년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이 땅에 복귀했고 또 지금 국어의 소리에서도 구별되기 때문에 우리는 둘 간의 차이를 깨달아 ‘ㆆ’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훈민정음 ‘중성’을 현대 언어학에서 말하는 ‘모음(vowel)’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음’은 ‘ㅇ, ㆆ’ 더하기 ‘중성’이다. 구체적으로, 전설모음 ‘이[i]’는 전설목소리 초성 ‘ㅇ’ 더하기 전설중성 ‘ㅣ’의 합음이다. 후설모음 ‘우[u]’는 <사진>에서처럼 후설성 목소리 초성 ‘ㆆ’ 더하기 후설중성 ‘ㅜ’의 합음이다. 천지인 3극 체계의 훈민정음에선 중성이 3분되니, ‘ㅣ’는 혀가 앞으로 펴져 혀끝이 아랫니에 닿는 전설중성이고, ‘ㅡ, ㅏ, ㅓ’는 혀가 조금 수축되는 중설중성이며, ‘•, ㅗ, ㅜ’는 혀가 뒤로 수축되는 후설중성이다. 문제는 중성과 달리 2분되는 목소리 초성에 있다. ‘ㅇ’은 전설초성이지만, ‘ㆆ’은 후설성(後舌性)으로 ‘후설’은 물론 ‘중설’을 포함한다. 고로 2분 초성과 3분 중성이 결합되면, 피아노 건반의 반음 비슷한 미묘한 음(초성 우선)이 발생한다. 즉, 지금은 ‘인’으로 통합해서 쓰지만 본래 ‘인도(引導)’의 ‘인’은 혀끝이 아랫니 뒤에 닿는 전설모음 ‘이’의 ‘인’이고, ‘월인천강지곡’에서의 ‘印(도장 인)’은 혀끝이 아랫니에서 떨어지는 ‘인’이어서 훈민정음으론 초성에 ‘ㆆ’을 썼다. ‘音(소리 음)’과 ‘淫(음란할 음)’도 발음이 서로 다르다. ‘音[ɨm]’은 혀끝이 떨어지므로 설축(후설+중설) 초성 ‘ㆆ’을 쓰지만, ‘淫[ɪm]’의 정음은 혀끝이 아랫니에 닿는 전설초성 ‘ㅇ’의 ‘음’이다. <계속>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