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예수정 "40년 무명배우? 연기자유를 만끽하죠!"
극단 산울림 50주년 기념작 '앙상블' 출연
진정한 배우는 정년에 시달리기보다, 갈수록 자유를 만끽한다. 추석 연휴 직전인 11일 서울 서교동 소극장 산울림에서 배우 예수정(64)을 만나고 든 확신이다.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2017)에서 형제 '자홍'·'수홍'을 한없이 감싼 모성애로 극장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든 얼굴과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2019)에서 며느리를 강하게 압박하며 "너는 왜 자아가 있니"라고 모질게 몰아붙이는 대기업 총수 '장회장'의 얼굴이 모두 그녀의 한 얼굴에서 나왔으니. "장회장 역을 하는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권도은 작가가 아주 말을 차지게, 못 되게 써놓았잖아요. 평상시 사람들이 가슴 속에 두고 있던 말들인데, 한편으로는 시원하더라고요. 하하." 연극 무대에서 일찌감치 예수정의 연기를 톺아봐온 이들은 그녀의 변검술 같은 연기에 이미 감탄해왔다. '연극계 대모'라 불리는 그녀다.
이번에는 임영웅(83) 예술감독이 이끄는 극단 산울림이 창단 50주년을 기념해 19일부터 10월20일까지 서교동 소극장 산울림에 국내 초연하는 연극 '앙상블'에 출연한다.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 작가 겸 배우 파비오 마라(35)의 '앙상블'이 원작이다. 어머니와 두 남매, 세 식구의 이야기다. 가족 구성원이 지적 장애를 겪을 때 벌어질 수 있는 갈등과 애증의 양상을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하게 그린다. 예수정은 지적 장애를 가진 아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어머니 '이자벨라'를 연기한다. "우리는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학습이 돼 있지 않죠.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면 되는데, 신체,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나타나면 먼저 놀라기부터 하죠. 결핍된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생각하는 계기를 주는 연극이에요. 지적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서 햇살 같은 찬란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죠," 예수정은 모성을 대표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영화 '신과 함께'뿐 아니라 영화 '터널'(2016)에서 구조작업을 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 모성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지만 모성에 가까운 선함을 각인시킨 영화 '부산행'(2016)의 '인길 할머니'를 연기한 그녀다.
그래서 이번 '앙상블'에서 기존에 전형화된 모성을 생각하면 판타지가 될 수 있다고 경계했다. "이자벨라도 자신의 고집대로 아이를 챙겨주고 보호해줘요. 아이는 실제로 더워하는데, 추울 거라고 생각하며 옷을 막 입혀주는 거죠.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이를 존재로서 바라보고 대화하고자 하는 용기를 갖게 됩니다. 무조건 보호하는 것이 아닌, '진짜 대화'를 하게 되는 거죠." 12월에는 극단 맨씨어터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초연하는 연극 '메리 제인'에 출연한다. 미숙아로 태어나 세 살이 된 아들 하나를 키우는 싱글 맘 ‘메리 제인’의 이야기로 예수정은 '루디'와 '텐케이', 1인2역을 맡는다. 이 중 한 배역은 메리 제인을 돕는 캐릭터다. 모든 출연 배우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특기 할만하다. 이 작품 역시 결핍에 대해 다룬다. 예수정은 "생체학적인 결핍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역시 고민할 기회를 줄 것"이라고 여겼다. MBC TV 드라마 '전원일기'로 잘 알려진 배우 정애란(1927~2005)의 딸인 예수정은 1979년 한태숙 연출의 연극 '고독이란 이름의 여인'으로 연기에 발을 들였다.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신과 함께' '부산행'을 비롯 등 4편의 1000만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예순이 넘어 이렇게 각광 받는 배우는 찾기 힘들다.
특히 장년층의 여성배우로서 다양한 결을 보여주는 캐릭터를 연달아 맡고 있다. KBS 2TV 드라마 '공항 가는 길'(2016)에서 맡은 인간문화재 매듭장을 비롯 노년이지만 프로페셔널한 직업을 갖고 있는 입체적인 인물들을 최근 들어 연기했다. "100세 시대에 예순은 고령이 아니에요. 오히려 한참 새로운 것을 학습하고 지적인 능력이 더 무르익을 때죠. 그런데 일부 작품에서 장년층을 아이들 흉내 내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난센스죠." 그래서 10월3일 개막하는 '부산국제영화제'(BIFF) 경쟁부문 뉴 커런츠 상 후보작인 영화 '69세'(감독 임선애)를 눈여겨볼 만하다고 추천했다. 예수정이 주연한 작품으로 노년에 대한 삶을, 다른 시각으로 진지하게 성찰하는 작품이다. 예수정의 연기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다. 안락사를 다룬 영화 '씨 인사이드'(2004)의 예를 들며 존엄사를 진지하게 다룬 작품이 있으면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 "'씨인사이드'에는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정신분석적인 이야기, 노인, 젊은이 이야기가 다 나와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다시 연극을 택할지 물었다. "운동선수가 되고 싶어요"라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숭의여중·고를 거쳐 고려대를 졸업한 후 독일 뮌헨대에서 연극학 석사를 수료한 예수정은 "머리도 좋지 않은데, 생각을 하고 의미를 찾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고 싶다"며 웃었다.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면 좀 더 나가서 뛰고, 땀 흘렸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몸도 마음도 더 건강해졌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고요. 숭의여중이 농구로 유명한 학교인데, 중2 때 농구를 하고 싶어 농구부까지 찾아갔어요. 근데 키가 작다고 안 됐죠. 하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가 되고 싶기도 하고. 여름에도 스케이트를 타러 갔었어요. 나이가 들수록 건강한 육체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정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배우 중 하나다. 나이와 육체가 비밀스러운 협연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예수정이 육체, 정신으로 빚어내는 세계는 여전히 휘황찬란하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