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색으로 드러난 정주영...그림의 기후 '생생화화'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서 6년만의 개인전이전 '산의 풍경'서 변신 신작 '기상학 연작' 공개하늘 구름 일몰 등 색으로 치환 무한 감각 확장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미술은 생생화화(生生化化)다. 와~ 이 그림, 보라빛 아우라에 절로 탄성이 터진다. 감각을 열어준 것일까? 소름도 올라온다. 새털 같은 붓질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일렁이는 그림은 색감으로 압도한다. 산등성이 같기도 하고 뭔지 모를 형상은 알고 보면 뜻밖이다. "어느 여름날 만났던 '먹구름'이 지나간 하늘이에요." '몹시 검은 구름'의 아름다운 변신은 무죄. 색으로 '생생화화'한 구름은 시간과 붓질이 짜여진 공간이다. 교묘한 환상을 직조해낸 정주영 작가는 "매일매일 변화무쌍한 하늘과 구름, 그 형태가 없는 혼돈의 근간이자 모호함을 색으로 치환했다"고 했다.('빛은 색이니, 그림자는 색의 결핍'이라고 했던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의 기법이 스며있다.)
먹구름이 보랏빛으로 나온 건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먹구름은 굉장한, 특별한 회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빨노파' 3원색을 섞으면 회색이 되는데 거기에 명도를 높여 흰색을 섞고, 옅은 분홍색, 파랑색을 덧칠한 색들의 중첩에서 나온 색입니다." 이전 산의 풍경을 그려온 작가의 대변신은 성공적이다. 신작 '기상학 연작'은 색이 도드라지는 변화로 '산의 작가'가 맞아? 할 정도다. "예전 작품에 색이 억제되어 있었다면 이번엔 모든 색을 겹치고 지우고 다시 만들어내는 과정이 작품을 만들어냈죠. 감각에 대한 것도 관람객에게 감성적으로 직관적으로 갈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밝은 색감의 정서는 물론 코로나 사태 영향이기도 하고요."
2017년 이후 갤러리현대에서 6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개인전은 '그림의 기후'전으로 펼친다. '산-풍경’ 시리즈 중 '알프스' 연작의 최신작과 ‘기상학’을 주제로 산 너머의 하늘과 구름, 대기 등의 풍경으로 시선을 넓힌 새로운 연작까지 60여 점을 소개한다. 색의 변화로 시간 계절 날씨의 변화를 기록했다. 작품의 '생생화화'는 직관의 힘이다. 북한산, 인왕산, 도봉산, 알프스 까지 직접 가서 보고 들어내고 드러낸 '풍경의 초상'이다. '그림의 기후'전의 출발점에는 '알프스' 연작이 초심이 담겨있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뾰족한 봉우리들과 빙하가 어우러진 일대를 2006년 답사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촬영한 사진 자료와 자신의 기억을 기반으로 2018년부터 '알프스' 연작이 시작됐다. 지각변동과 침식작용 끝에 생겨난 절묘한 형상과 마그네슘, 칼슘, 철 등이 함유되어 있어 붉은색을 띠는 암석을 그리다 인식과 감각의 전환을 맞이한다. "산의 모습에서 사람의 얼굴과 손, 다리 등 신체의 일부가 연상 되더라고요." 빙하가 녹아있는 알프스 연작은 그래서 살포시 포갠 거대한 손가락이 보이기도 하고, '뼈미남' 같은 건장한 체구의 몸선도 드러난다.
'알프스'에서 마주한 웅대하고 낭만주의적인 하늘 풍경은 ‘기상학’을 주제로 새롭게 선보인 하늘 연작과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알프스'연작을 준비하며 계절과 시간을 나타내는 하늘에 처음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요. 코로나 팬데믹이 장기화하면서 변화의 상태가 더 긴박하게 다가왔고, 예상치 못한 사고의 전환을 갖게 됐죠." 하늘과 구름, 일몰 일출...실체가 없지만 우리 눈앞에 분명히 펼쳐지는 이 풍경들의 존재감은 작가 특유의 선묘적인 필법이 무기다. 경계 없고 한계 없는 풍경을 색으로 끄집어낸 건 작가의 '긋기' 내공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리드미컬한 색색의 선들의 흔적이 오로라 현상까지 전한다. "일몰의 순간, 장엄함 레퀴엠이 들리는 것 같았어요. 빨리 뜨고 빨리 지지만 느린 시간처럼 지나가는 그 일몰의 경험을 색으로 치환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해서 나왔죠. 그렇다고 단박에 그려진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아랫부분이 파랗게, 위에는 빨간색으로 칠했는데, 칠하기를 덧칠하기를 반복하면 색깔이 바뀌어 집니다. 위로 아래로 옆에서 옆으로 겹쳐 칠하면 지우는 것과 같아져요."
겹침과 혼돈의 수많은 붓질이 만든 몽환적인 색감의 화면은 경쾌하고 산뜻하다. 마치 수채화나 오일 파스텔의 흔적처럼 보이지만 기름 섞은 유화로 제작됐다. 캔버스가 아닌 린넨에 그린 덕분이기도 하다. 전시의 부제인 ‘Meteorologica’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공기와 물, 땅에 관한 여러 기후 현상들을 관찰하고 이를 자연 철학적으로 기술한 책 '기상학(Meteorology)'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연작의 제목이 'M'으로 시작하는 이유다. 기상학(Meteorology)의 이니셜 M을 사용해 작가가 그린 순서대로 번호를 부여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의 기후를 색으로 포착해낸 정주영의 신작은 오랜만에 '그림 보는 맛'을 전한다. '고정관념이 멍청이를 만드는 거야'(故 정주영 회장 어록)라는 말 처럼 '색화'된 수행적인 붓질의 무게가 보여준다. '우리의 삶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도 여전히 새롭고 나날이 새로운(생생화화 生生化化)인식과 정신의 지평을 여는 일이라는 것'을. 전시는 3월26일까지.
◆정주영 작가는? 1969년 서울 출생으로 1992년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1997년 독일 쿤스트 아카데미 뒤셀도르프, 네덜란드 드 아뜰리에를 졸업했다. 쿤스트 아카데미 뒤셀도르프에서 얀 디베츠(Jan Dibbets)교수로부터 마이스터슐러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종합예술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누크갤러리(2021), 이목화랑(2020), 갤러리현대(2017, 2013), 몽인아트센터(2010), 갤러리 175(2006), 아트선재센터(2002), 금호미술관(1999)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 신세계 갤러리, 아트선재센터, 몽인아트센터, 경기도 미술관, 대구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