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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립 잡기노트]국내산 고사성어 되려나, 사전오기·안습…

등록 2015-02-06 13:07:31   최종수정 2016-12-28 14: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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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495>

 ‘문을 막아 의로움을 지킨다’는 두문불출(杜門不出) 또는 두문지의(杜門之義)는 고사성어다. 옛날에 있었던 일(古事)에서 유래해 관용적인 뜻으로 굳어 쓰이는 글귀(成語)다. 역사적 사건이나 신화, 전설, 문학 등에 나온 이야기들이 짤막한 몇 글자로 압축돼 오늘까지 맥을 잇고 있다. 선현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와 교훈이 바탕인만큼 현대인에게 삶의 지혜와 방향을 제시하는 말로 널리 사용된다.

 대개 넉 자로 이뤄져 사자성어라고도 하는 고사성어는 한자성어다. 따라서 중국산 일색이라고 짐작하는 것이 상식인 듯하나, 무식이다. 국산 고사성어가 수두룩하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를 섬기던 충신들이 조선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두문동으로 들어가 고사리만 캐 먹고 나오지 않은 데서 비롯된 말이 두문불출, 한국 고사성어다.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 이전투구(泥田鬪狗)도 한국산이다. 함경도 사람의 강인한 성격을 평한 말이었다. ‘돈이나 물건을 아끼지 않고 함부로 쓰는’ 흥청망청(興淸亡請)은 폭군 연산군의 문란과 패륜이 낳았다. 왜가 선조에게 ‘명을 치고자 하니 길을 내달라’고 요구한 뒤 그 핑계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데서 ‘가도공명(假道攻明)’이 탄생했다.

 이처럼 이땅에서 태어난 고사성어는 많다.

 막비천운(莫非天運) 하늘의 운은 막지 못한다, 함흥차사(咸興差使) 한 번 간 사람이 소식이 없다, 쇄골표풍(碎骨飄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려버리다, 아사리판(阿闍梨判) 질서가 없이 여럿이 어지럽게 어울린다, 야단법석(野壇法席) 떠들썩하게 시끄럽고 여럿이 모여서 다투고 시비하는 모양, 이판사판(理判事判) 막다른 데에 이르러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다, 자린고비(玼吝高鯡) 돈이나 물질을 지나치게 아끼는 구두쇠, 도이봉부(刀以逢父) 칼로 인해 아버지를 만나다,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왕불식언(王不食言) 왕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온달과 평강), 견훤지말(甄萱之末) 견훤의 좋지 못한 끝맺음, 선방귀객(先訪貴客) 먼저 방문하는 사람이 귀한 손님(문정왕후), 예이태교(禮以胎敎) 예로써 태교를 하다(신사임당), 재다수화(財多隨禍) 재물을 지나치게 많이 가지면 화가 따른다(이지함), 백의종군(白衣從軍) 벼슬 없이 군대를 따라 싸움터로 감, 칠세입춘(七歲立春) 일곱 살에 입춘방을 쓰다(김정희), 타금지단(拖錦之端) 비단의 끝머리를 끌다(김시습), 와이구명(蛙以求命) 개구리로 사람의 생명을 구하다, 이언치부(耳言致富) 귓속말로 돈을 벌다, 내심구압(耐心求鴨) 인내심이 오리를 구하다, 공수편매(共水騙賣) 대동강 물을 팔아 먹다(봉이 김선달), 소력탈국(消力奪國) 힘이 빠지게 해 나라를 침공하다(장수왕), 능자승당(能者昇當) 능력 있는 자가 승진하는 것은 당연하다, 서금일롱(書衾一籠) 재산은 책과 이불과 농 하나뿐, 인사수심(人事隨心) 사람의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신토불이(身土不二) 몸과 흙은 둘이 아니라 하나, 무영무애(無影無愛) 그림자가 없으면 사랑도 없다(석가탑), 진화구주(鎭火救主) 개가 불을 꺼서 주인을 구하다(오수견), 실기치명(失期恥命) 때를 놓치면 목숨이 수치스럽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매천야록’, ‘조야집요’, ‘격몽요결’ 등에서 토종 성어들을 찾아낸 ‘한국 고사성어’의 편저자 임종대씨는 “한자성어는 죽은 말이 아니다. 현대에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홍수환의 ‘사전오기(四顚五起)’, 지강헌의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지상렬의 ‘안습(眼濕)’, 이경규의 ‘복수혈전(復讐血戰)’ 등도 고사성어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타당하다. 반짝 인기에 그치지 않고 시대를 관통해 살아남은 당대의 유행어가 곧 고사성어이기 때문이다. 전제는 언중의 공감이다. 시절에 휩쓸리지 않는 동의가 수명을 좌우한다.

 그러나 상당수 낯선 한자성어 앞에서는, 이 또한 고사성어일 ‘억지춘향’을 떠올리는 이들이 있다. 통치 편의를 위해 순우리말 땅이름을 일본식 지명으로 갈아버린 조선총독부 앞에서 느꼈을 불가항력이 오버랩된다.

 왕이려이(王耳驢耳)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묘항현령(猫項懸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당금여석(當金如石) 황금 보기를 당연히 돌같이 하라(최영), 여시여시(汝是汝是) 너의 말이 옳고 너의 말도 옳다(황희), 물언아사(勿言我死)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이순신), 포요투강(抱腰投江) 허리를 붙잡고 강물에 뛰어들다(논개), 도정누란(到整累卵) 달걀을 거꾸로 쌓다(사명당) 따위는 아무래도 앞뒤가 바뀐 것 같다. 일제강점기 ‘조선 지지(地誌) 자료’로 퇴행하는 감도 없잖다.

 몽고반점을 중국집이라고 우기는 놈, 복상사를 절이라고 우기는 놈, 설운도를 섬이라고 우기는 놈, 안중근 의사를 병원 의사라고 우기는 놈, 청남대를 대학이라고 우기는 놈, 구제역을 지하철역이라고 우기는 놈, 공모주를 술 이름이라고 우기는 놈, 노숙자를 여자라고 우기는 놈, 달마도를 섬이라고 우기는 놈, 대주교를 다리라고 우기는 놈, 곡선미를 쌀이라고 우기는 놈에게는 더더욱 못마땅할 것이다. 이 놈은 인터넷을 떠돌고 있는 ‘참 한심한 놈’이다.

 편집부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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