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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갉아먹는 열정페이]④표준근로계약서 도입, 상생의 길로

등록 2015-02-11 09:02:37   최종수정 2016-12-28 14: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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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김인철 기자 = 7일 서울 중구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열린 패션업계 부당노동사례 발표 기자회견에서 패션노조와 청년유니온 관계자들이 패션업계 청년착취대상자로 지목된 이상봉 디자이너에게 대리시상을 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15.01.07.  [email protected]
수입 적어 베테랑도 겹치기 출연 많아 공연계 새별 진입장벽 높이는 걸림돌로 공연수준 끌어올려 몸값 높이기 나서야

【서울=뉴시스】유상우 이재훈 기자 = 야근수당을 포함한 월 급여가 수습 10만원, 인턴 30만원, 정직원 110만원. 최근 이상봉 디자인실의 급여 수준이 알려지면서 ‘열정 페이’ 논란이 일었다. 이 사건으로 열정 하나로 끊임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의 현실이 재조명되고 있다.

 영화 촬영현장에서 조명일을 하던 30대 스태프는 6개월간 매일 15시간을 일하고 월 60만원을 받았다. 그나마 촬영하던 영화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면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30대 미혼남’인 대학로의 평균 연극인은 수입이 월 77만원에 불과했다. 공연계 특성상 20대에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지 못하면 30대엔 가정을 꾸리는 일이 불가능해 판을 떠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우리나라 대중문화·예술계는 분야별로 차이는 크지만, 상당수가 독립적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연 매출 5000억원 규모에 못 미친다. 대학의 관련 학과에서 지원자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이들을 수용할 ‘괜찮은 일자리’는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렵다.

 업계의 특성상 도제식 교육을 통해 실력이 검증되지 않으면 명함도 내밀 수 없다. 도제식 교육은 알음알음으로 소개를 받아 관계가 맺어지다 보니 정식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고 구두계약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로 최저 시급에 못 미치는 보수를 받고 밤샘, 허드렛일에 시달리면서도 입도 뻥끗 못 하고 사는 게 ‘열정 페이’ 희생자들의 속사정이다. 이렇게 만연한 ‘열정 페이’는 업계의 관행이란 핑계로 꿈을 이루고자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습득해야 하는 젊은이들의 실습 과정을 교묘하게 악용한다.

 공연계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은 무엇보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대학 공연 관련 학과들의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보조 무대감독 A는 “인기 학과라고 개설해놓고 졸업 때는 학생을 방치하는 학교들이 많다”고 꼬집었다. “공연계는 자발적으로 일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팽배하다 보니 버티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일부 공연계는 이렇게 적폐가 돼가는 ‘열정 페이’를 내부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극히 일부지만 정기적으로 월급을 주기 시작한 단체도 있다. 무대 스태프들이 뭉친 모 회사는 공연이 없을 때도 월급을 준다. 이 회사에 소속된 20대 후반의 보조 무대감독 B는 “큰돈은 아니지만, 월급을 받는다. 보통 직장인처럼 돈을 계획적으로 쓸 수 있어 무엇보다 좋다”면서 “정규직으로 4대 보험 보장도 된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열정 페이’의 당사자들이 스스로 몸값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계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대표는 “청년들이 제작사와 계약서를 제대로 쓰고 자신의 가치를 정당하게 요구해야 한다”면서 “초반에는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겠지만, 제작사가 정말 그 사람이 필요하면 정당하게 고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선순환 구조가 생길 것”이라고 짚었다.

 공연계에 몰린 인력의 허수를 줄이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박 대표는 “고급 인력들이 자리가 한정된 공연계만 바라보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낭비”라고 했다. 청년들은 허수가 되지 않기 위해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필수다. 인터파크가 운영하는 ‘인터파크 스탭스쿨’에 대한 호응이 높은 이유다. 뮤지컬과 콘서트에 필요한 프로듀서, 연출, 제작, 기술, 무대 등의 이론과 실무를 익히는 전문가 과정이다. 게다가 6개월 교육비가 무료다. 인터파크INT ENT 부문 김선경 홍보팀장은 “올해 초 3회째를 끝냈는데 뽑는 인원보다 이력서가 30배나 많이 들어왔다”면서 “전문적인 인력을 키우는 만큼 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수료자들이 많다”고 전했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처럼 통계 데이터를 모을 수 있는 시스템의 활성화 역시 중요한 과제다. 이를 통해 제작사의 수입 등이 투명하게 공개되면 그만큼 스태프에게 정당한 몫이 돌아갈 수 있다.

 지혜원 공연 칼럼니스트는 공연계 ‘열정 페이’가 비단 20대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공연계 종사자를 살펴보면 20대 후반의 여성부터 30대 초반의 여성까지의 비율이 가장 높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30대 이상의 남성들은 버틸 수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자본주의 논리가 적용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최소한의 생계비를 보장할 수 있는 표준계약서 도입이 절실한 이유다.”

 수입이 적은 탓에 베테랑들이 겹치기 공연을 할 수밖에 없다 보니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년들에게 ‘진입 장벽’이 생기는 구조도 지적됐다. “베테랑에게만 일이 몰려 고용이 전체적으로 늘어나지 않게 된다”면서 “계약서상에 겹치기 출연을 금한다는 내용을 명시하는 것도 방법이다. 물론 한 작품만 감당해도 금전적인 여유가 생기도록 정당한 페이 지급은 필수”라고 했다. “그래야 공연의 질도 높아진다. 열정 페이를 근절하려는 노력은 공연계 전체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수렴된다.”

 영화 ‘국제시장’의 윤제균 감독은 “표준근로계약서가 더 철저하게 영화 준비를 하게 했다. 이 덕분에 질 높은 결과물을 내놓게 됐다”고 평가했다.

 표준근로계약서를 체결하면 제작비는 적게는 1억원에서 많게는 3억원까지 늘어난다. 만약, 근로시간이 하루 12시간을 넘어가거나 촬영이 원활하지 않아 밤을 새우기라도 하면 스태프에게 지급해야 하는 임금이 늘어난다. 자연스럽게 제작비가 급격하게 불어난다.

 윤 감독은 “한정된 제작비로 영화를 찍어야 하는 상황에서 제작비가 늘어나는 건 최악의 상황이 될 수 있다. 감독과 주요 스태프는 촬영 전 어떻게 하면 영화를 더 효율적으로 촬영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시장’을 찍으면서 단 한 명의 노는 스태프 없이 모든 것을 통제한 채로 커트 단위로 촬영 시간을 쪼개 작업했다”고 밝혔다. 이런 준비가 1000만 이상 관객을 가능하게 한 요소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올해 개봉을 앞둔 ‘시간이탈자’를 제작한 상상필름의 안상훈 대표도 윤제균 감독과 같은 생각이다. 상상필름은 ‘시간이탈자’에 참여한 모든 스태프에게 표준근로계약서를 쓰게 했다. 안 대표는 “표준근로계약서는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다”고 평가했다. “촬영 회차를 효율적으로 조절하고 촬영 시간을 단축해 스태프가 다양한 현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표준근로계약서는 효율적으로 일하면서도 성과를 낼 수 있는 스태프를 찾는 영화가 늘어나게 할 것”이라며 “이는 경쟁으로 이어져 영화 스태프의 능력을 올려주고 영화도 발전할 것”이라고 짚었다.

 정부도 팔을 걷어붙였다.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근로조건 개선에 활용될 표준근로계약서를 추가로 보급하기로 했다. 영화와 방송제작 스태프 외에도 음악, 캐릭터,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등 문화콘텐츠 산업 종사자로 확대한다는 내용이다.

 근로자에 해당하는 스태프 등이 다수 종사하는 현장을 대상으로 노동관계법 준수와 교육, 지도, 점검을 통해 최저임금 등 근로조건을 개선할 예정이다. ‘장래 취업활동을 위한 지식·경험 습득’이라는 제도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저임금 노동력 활용의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과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방송사 또는 제작사가 만든 방송프로그램의 극본집필에 참여하는 모든 방송작가에 대한 표준집필계약서도 준비하고 있다. 현실에서 약자의 지위에 놓여있는 작가의 법적 지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주요 내용으로는 우선 ‘4대 보험 가입’이 담긴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강행규정’은 아니지만 적어도 작가의 처지에서는 표준계약서에 따라 방송사 또는 제작사에 4대 보험 가입 권리를 요구하거나 협의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한콘진은 설명했다. 또 원고료 지급보증, 계약변경에 따른 불이익 방지, 이차적 저작물 사용에 따른 대가 확보, 지나친 지연배상금 제한, 집필 환경 개선을 위한 의무조항을 마련할 예정이다.

 문체부는 방송사 및 제작사와 논의를 거쳐 올해 안에 표준집필계약서를 마련하고 시행에 들어간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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