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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립 잡기노트]“오키나와도 우리땅, 삼별초·홍길동”

등록 2015-03-10 19:57:55   최종수정 2016-12-28 14: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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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뉴시스】평화의 주춧돌. 일본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502>

 일본의 고대 답가(踏歌), 즉 밭매는 소리 가운데 ‘아라리’가 있다. 아라리는 류큐(琉球·옛 오키나와) 말로 ‘새가 소리내다’, ‘울다(鳴)’라는 뜻이다. 조선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일본학계는 풀이한다.

 ‘아리랑’의 원어인 아라리는 일본 오키나와에도 남아 있다. 서지학자 김연갑은 “구비 전승체인 노래의 인류문화학적 전파 계기는 집단 이주다. 이주해서도 일정 규모로 집단을 이뤄 이주지에 흡수·동화되지 않을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전제한다.

 오키나와의 슈리(首里)성과 우라소에(浦添)성 터에는 ‘계유년에 고려 기와 장인이 제작하다(癸酉年高麗瓦匠造)’라고 양각된 회색 기와가 있다. 현지에서는 ‘고려 기와’라고 부른다. 진도 용장산성의 기와와 같은 것이다.

 삼별초는 용장성에서 고려의 관·몽골군과 맞싸웠다. 대몽강화(對蒙講和)에 반발한 삼별초는 1270년 반란을 일으켰다. 강화도를 거쳐 진도에 진을 쳤다. 이듬해 관군과 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제주도로 후퇴했다. 그리고 1273년, 제주의 삼별초는 고려·몽골 연합군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다.

 1273년이 바로 계유년이다. 오키나와 고려 기와의 제작연도다. 1273년 제주도를 탈출한 일부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옮겨갔다고 할 수 있는 물증이다. 김연갑은 “동서로 1000㎞에 달하는 오키나와 열도는 제주도 남쪽으로 평균 780~800㎞ 떨어져 있다. 유속이 빠른 해류를 타면 보통 열흘에서 보름, 빠르면 1주 안에 제주에서 오키나와에 도달한다. 그 뱃길을 그 시기에 건너가 새로운 삶을 꾸렸을 집단은 삼별초 군 뿐”이라고 지적한다.

 “3년에 걸친 삼별초의 대몽투쟁은 외세 침략에 완강하게 저항한 영웅적 호국항쟁이었다. 각 계층 사람들이 대열에 참여했고, 대다수가 저항의식을 지닌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제주에서 진압됐다 해도 그들의 성향은 어떤 형태로든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잔존세력의 최후와 처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집단이주의 결과”라고 짚는다.

 또 “오키나와의 큰 성은 삼별초 군의 조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성을 쌓고 경쟁했다는 사실은 축성술과 전쟁술에 능한 외부세력에게 자극을 받은 결과다. 류큐국의 정사는 비로소 13세기 이후부터 기록되고 있다”고 부연한다. 삼별초는 이렇게 오키나와 아라리의 존재를 우선 설명한다.

 다음, 홍길동(1440?~1510?)이다. 1500~1501년 조선 의금부는 홍길동 사건을 수사했다. 홍길동의 신분이나 행적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그러나 없다. 조사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으려니, 무책임하게 추정할 따름이다. 궁금하기 짝이 없는 홍길동의 뒷 얘기는 픽션의 몫으로 넘겨졌다.

 허균(1569~1618)은 소설 ‘홍길동전’에 홍길동이 율도국(律島國)에서 이상적 왕국을 건설했다고 썼다.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법과 둔갑술을 부려 무리 2000명을 이끌고 이주한 곳이 율도국이다. 김연갑은 “홍길동이 조선에서 죽은 흔적이 없고, 이후 야사나 소설은 홍길동의 출국 이야기를 직접 또는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1500년 홍길동이 의금부에 체포됐을 무렵에는 가뭄 탓 도둑들로 인한 피해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정부는 백성들의 공물을 감해주고, 감옥의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이때 홍길동 집단을 해외로 이주시키는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짚는다.

 오키나와 이시가키(石垣) 섬의 오야케 아카하치(赤蜂) 기념비문은 홍길동의 오키나와행을 지지하는 유리한 자료다.

 ‘오야케 아카하치는 별명을 ‘홍가와라 아카하치’라고도 칭했다. 그는 군웅할거 시대에 두각을 나타내 당시 오하마손(大浜村)을 근거지로 집단생활을 했으며 민중의 제왕으로 추앙받았다. 분메이(文明) 18년(1486) 오키나와 본도 주잔(中山) 왕조의 쇼신(尙眞) 왕은 사신을 야에야마(八重山) 지역으로 파견해 이리키야아마리 제를 음사사교(陰祀邪敎)로 규정해 금지했는데, 이 신앙 탄압에 섬 주민들은 격분했다. 아카하치는 선두에 서서 주잔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주잔에 대한 조공을 3년에 걸쳐 중단, 정부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쇼신 왕은 대리 왕자를 대장으로 삼아 구메(久米)섬 신녀(神女)인 기미하에(君南風)와 함께 정예부대 3000명과 병선 46척을 보내 진압에 나섰다. 아카하치는 방전분투(防戰奮鬪)했으나 역부족으로 패하고 종적을 감췄다. 1500년의 일이다. 아카하치는 봉건제도에 반항해 자유민권을 주장하고 주민들을 위해 용감히 싸운 것이다. 싸움에서는 지고 말았으나 그의 정신과 행동은 길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여기에 비석을 세움으로써 그의 위업을 기리는 바이다.’

 김연갑은 이 비석의 주인공 ‘홍가와라(洪家王)’가 홍길동이라고 지목한다. 활동 시기가 같고, 이름이 유사하고, 활동 성격이 같다는 점이 근거다. “그를 따른 2000여명의 무리는 민요를 삶의 노래로 향유한 농민들로, 이들이 아라리를 전파시킨 것”이라고 추측한다.

 “삼별초나 홍길동의 집단 이주가 아니면 아라리는 오키나와에 전파될 수 없었다. 오키나와 아라리로 두 집단의 이주가 입증되고, 두 집단의 이주로 아라리의 전파가 입증된다.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 역사다.”

 편집부국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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