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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립 잡기노트]흥사단, 이쯤되면 생떼다

등록 2015-04-13 08:03:00   최종수정 2016-12-28 14: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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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동욱 기자 = 3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흥사단 애국가 작사자 연구논문 발표회'에서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발표를 하고 있다. 2015.03.31.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509>

 애국가 연구의 최고권위인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흥사단에게 ‘양심고백’을 촉구했다.

 지난달 31일 흥사단 주최 ‘애국가 작사자 연구논문 발표회’에 참석, ‘윤치호 애국가 작사 연구’를 발제한 김 상임이사는 다음날 이윤배 흥사단 이사장에게 면담을 청했다. 13일 현재까지 만남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김 이사는 “그날 행사는 ‘애국가 작사자 연구논문 발표회’가 아니라 ‘윤치호 작사 확정반대 대회’였다. ‘안창호 작사 연구’나 ‘안창호 작사설’은 나오지 않았다. 친일문제나 관련자료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꼬투리를 잡은 것 자체가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윤치호가 지었기 때문에 나는 안창호가 짓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발표회에서 김 이사는 크게 8가지 사실을 근거로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확정했다.

 ①현 애국가와 후렴이 동일한 ‘무궁화가’의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것을 아펜젤러와 서재필이 확인했다.

 ②윤치호는 1945년 1월 작고 직전 자신이 지은 애국가 가사 4절을 붓으로 쓰고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적었다.

 ③윤치호는 현 애국가 4절과 동일 후렴의 ‘무궁화가’를 수록한 ‘찬미가’를 1908년 역술, 발간했다.

 ④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밝힌 일제강점기 신문, 총독부 기록, 미주 간행물, 광복 직후 공보처 기록이 10여종에 이른다.

 ⑤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증언이 다른 어떤 인물들보다 많고 내용도 구체적이다.

 ⑥안창호는 대성학교 수학교사인 채필근 목사에게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했다. 안창호도 인정한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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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동욱 기자 = 3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흥사단 애국가 작사자 연구논문 발표회'에서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발표를 하고 있다. 2015.03.31.  [email protected]
 ⑦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최종회의는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발표하는 것을 표결, 11대 2라는 결과를 얻었다. 확정발표를 하지 않았을 뿐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사실을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⑧가족과 유관단체들은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당연시하고 있다. 흥사단 기관지 격인 ‘기러기’ ‘새벽’ ‘나라사랑’ 등 간행물에는 ‘안창호 작’이라는 기록이 없다. 심지어 서영훈 전 흥사단 이사장은 좌옹윤치호기념사업회 창립총회에서 “안창호 선생이 지으셨다는 당신의 기록이 없는 한, 안 선생 작사 주장은 오히려 결례”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김 이사는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은 소설가 이광수의 기록에서 확대 재생산된 단순 설이다. 이런 설을 갖고 흥사단은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라고 갑자기 우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찬미가 10장(무궁화가)과 14장(현 애국가)은 윤치호가 작사했고, 이를 애국가로 부른 것은 기독교계 학교와 3·1운동 현장의 민중이며, 애국가를 일부 개사해 국가(國歌) 대용(代用)으로 임시정부 의정원과 미주지역 국민회의 등을 통해 의례화하는 데 기여한 이는 안창호이고, 1948년 8월15일 국가(國歌)로 공식화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라고 정리했다.

 1955년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2차 회의 후 다음과 같은 보도가 나왔다. “현재 작사자 판정을 주저하는 큰 이유는 불건전하고 감정적인 선입견이 개재해 있기 때문에 계속 조사의 필요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첫 회합에서 작사자가 판명되기도 전 편찬위원 간에 ‘윤치호가 작사자라면 애국가는 개작돼야 한다’는 무모한 망언을 했었다고 한다. 이것은 조사위원의 상황 한계를 벗어난 지나친 불평이며 또한 윤치호씨는 친일한 사람이므로 작사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 고의적으로 작사자 판명에 무형의 압력을 가한 오류를 범한 일이라 하겠다.”  

 여전히 유효한 비판이다. 김 이사가 “논리도, 현실도 불통인 흥사단과 몇 년간 애국가 논쟁을 벌여 온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임감 없는 행정자치부,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에 실망한다. 60년 전 ‘무조건 친일은 안 된다’는 정서론에 주눅 든 오늘의 지식인들에게 무한한 배신감을 느낀다”고 토로하는 이유다. 

 애국가를 안창호가 작사했다고 강변하는 것은 스스로 대단한 민족운동이라도 하는양 착각하는 억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무책임한 술수일 수도 있다. 근대사 전공 학자나 국사편찬위원회 역시 끼어들면 손해라는 이기심으로 함구한 상태다.

 윤치호는 애국자였다. 윤치호는 애국가를 작사했다. 윤치호는 변절해 친일파가 됐다. 셋 모두 팩트다.  

 편집부국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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