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 할게요…"'나', 사람으로 대해주세요"
나는 입구에 들어서는 고객들을 밝은 목소리와 환한 미소로 맞이한다. 때에 따라 중간 서비스를 돌며, 계산을 할 때도 항상 웃고 있다. 때때로 고객의 날 선 목소리가 들린다. 고객의 컴플레인에 "죄송합니다" 밖에 할 수 없는 나는 '감정노동자'다. '감정노동'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말투나 표정, 몸짓 등 드러나는 감정 표현을 직무의 한 부분으로 연기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일을 수반하는 노동. 산업이 고도화되고 서비스업 종사자가 늘어나면서 등장한 노동 형태. 미국 버클리대 명예교수이자 여성 사회학자인 앨리 러셀 혹실드가 1983년에 낸 책 '통제된 마음(The Managed Heart)'에 등장한 용어. 이런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감정노동자다. 나는 항상 웃는 얼굴로 일한다. 사람들은 나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 혹은 '배우가 연기하듯 속내를 감춘 사람'이라고 칭한다. 회사에서 서류업무를 하는 직장인들도 상사에 의해 감정노동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밖으로 드러나려는 감정을 억누르고 일해야 한다. 2014년 서울시와 녹색 소비자연대에서는 870여명의 나를 대상으로 설문을 시행했다.
한국에서 나는 600만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1100여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2013년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나의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 81%가 고객으로부터 욕설 등 폭언을 들은 바 있다고 답했다. 이런 사실을 회사에 알리더라도 회사는 말로 위로하거나 참으라고만(74%) 했다. 심지어 무조건 고객에게 사과하라고 하는(19%) 등 근로자 보호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가 없다는 점이 지적됐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김기식·김기준·한명숙 의원이 공동주최한 정책토론회에서는 지난 1년간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회사 내의 제도가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됐다. 이렇게 가면을 쓴 내 실태는 처참하다. 정형화된 일을 반복하는데 감정까지 숨겨야 한다. 고객의 컴플레인에 사과하고 상사의 질책을 받는다. 화를 내는 고객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싶지만, 꾹 참고 친절히 응대해야 한다. 2012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3개 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566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항공기 승무원이 감정노동에 가장 많이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4년 12월에는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이 일등석에서 마카다미아를 봉지째 가져다준 승무원의 서비스를 문제 삼으며 난동을 부렸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승무원은 미소를 머금고 응대해야만 했다. 내가 받는 스트레스를 제때 해소하지 못하면 정신질환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특히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스마일마스크 증후군'을 겪게 된다. 전국의 수많은 내가 겪는 이 증후군은 밝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어떤 일이 있든지 계속 웃고 있는 증상이다. 마음은 우울한 상태가 이어져 식욕 등이 떨어지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실제로 다수의 나는 좌절·분노·적대감 등 정신적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이 심각해질 경우 일상생활로 복귀가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가면 밖 세상은 어떨까?
이런 내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새정치민주연합 김기식 의원은 지난 6일 '감정노동자 보호법안 6건'을 발의했다. 나의 보호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사업자에게 의무화하는 이 법안에는 금융관련업권 법률 5건(▲은행법 ▲보험업법 ▲상호저축은행법 ▲여신전문금융업법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과 ▲근로기준법이 포함됐다. 법안 발의에는 김기식 의원 외 21명이 참여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사업자는 피해 근로자를 위해 상담과 치료를 지원해야 하고 상시 고충센터를 운영해야 한다. 또 근로자가 해당 고객을 피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 김 의원은 "감정노동자 문제는 한편으로 사용자의 근로자 보호 의무와 관련된 문제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 인권 차원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대다수 감정노동자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성희롱과 폭언 등의 문제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는 것은 인권보호 차원에서도 시급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나를 보호하는 정책이나 제도는 고맙지만,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나를 '사람'으로 대해주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생존을 위해 가면을 쓰고 일하고 있는 사람아닌 사람인 나. 나를 바라보는 손님의 머릿속에는 암묵적인 갑-을 관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고객의 잘못된 권리'다. 이런 권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나는 계속 인격무시로 인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내가 하루 빨리 가면이 아닌 진정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