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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타 돼주렴"…'몸' 담보 잡힌 '임상시험 알바'

등록 2015-11-24 10:21:54   최종수정 2016-12-28 15:5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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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신정원 기자 = "생활비가 필요했어요. 집도 없이 학교 동아리 방이나 친구 자취방에 얹혀 지내지만, 사람이 밥값, 교통비, 담뱃값은 있어야 살잖아요. 참가하면 3주에 30만~70만원을 벌 수 있죠. 그만한 아르바이트가 없답니다."

 2~3일에 수십만 원, 단기간에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아르바이트(알바).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된다. 그냥 주는 약을 받아먹은 뒤 십여 차례 채혈만 하면 된다. 대학생들에겐 '꿀 알바'로 통한다.

 '생물학적 동등성(생동성) 시험' 아르바이트 얘기다.

 이미 세 차례 생동성 시험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김동원(가명)씨. 김씨는 신체 건강한 20대 약대생이다. 2012년 봄, 2014년 여름, 그리고 올봄. 그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생동성 시험에 참가했다. 김씨는 "약대에 입학한 뒤 학업과 여러 활동 때문에 아르바이트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며 "하지만 돈 쓸데가 많아 시험에 참가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임상시험의 천국, 대한민국

 임상시험 아르바이트 정보는 꽤 쉽게 구할 수 있다. 당장 포털사이트에 '임상시험'생동성 시험'만 검색해도 참가자를 모으는 관련 사이트가 여럿 뜬다. 주로 아르바이트나 시험 참가자 전문 모집 사이트다. 시험에 참가했다는 피험자들의 '후기'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하철에는 칸마다 임상시험 알바 모집 광고가 2~3개씩 붙어있다.

 최근 한 아르바이트 관련 사이트에 들어가 '생동성 알바'를 검색하자 채용정보 549건이 떴다. 하루 동안에만도 모집 공고가 20여 건이나 올라왔다. 죄다 '단기알바'투잡'고수익 단기' 등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있다.

 전문 모집 사이트에도 역시 메인 화면에 모집 공고 여러 건이 떠 있었다. 2박3일, 3박4일 일정에 서울, 경기 부천시, 경기 성남시 분당 지역 선호, 어떤 것은 비흡연 여성을 찾고 있었다. 생동성 시험보다 위험성이 높은 '임상 시험' 알바 참가자를 모집하는 글도 있었다.

 지난해 한국에선 임상시험 652건이 이뤄졌다. 세계 7위다. 2008년 400건, 2011년 500건(503건)을 돌파한 이후 2012년부터 3년째 600건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10년 전인 2004년 136건과 비교하면 4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순위도 2007년 19위에서 훌쩍 올라섰다. 특히 서울은 2012~2013년 도시별 임상시험 규모가 세계 1위로 독보적이었다. 그야말로 '임상시험의 천국'이다.

 세계적으로는 감소 추세다. 2008년 15만890건, 2009년 14만2592건, 2010년 15만904건, 2011년 13만9020건, 2012년 12만1653건, 2013년 8만465건 등으로 꾸준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지난 8월31일 '임상시험 글로벌 경쟁력 강화방안'을 발표했다. "2020년까지 세계 5대 임상시험 강국을 만들겠다"는 목표다. 지난해 세계 임상시험 시장 규모는 73조5000억 원에 달하는데 2020년까지 연평균 2.4% 성장할 것이란 것이 이유다.

 ◇위험한가, 위험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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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상시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신약 허가에 필수적인 '임상 시험'과 제네릭(복제약) 판매 허가를 받기 위해 실시하는 '생동성 시험'이다.

 임상 시험은 사람에게 처음 투입하는 '제1상'으로부터 판매 허가를 받은 신약의 유효성, 부작용 등을 수집하는 '제4상'까지 있다. 사례비는 60만~80만 원 수준인데 위험성이 가장 높은 제1상의 경우 100만 원이 넘기도 한다.

 임상 시험은 신약 개발을 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왕이면 난치병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거나 국내 의학 수준 및 의료산업 발전에 기여하면 좋다.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잠재적 위험성과 부작용이 뒤따르는 일인 만큼 충분한 사전 설명과 동의가 있어야 하고,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피해보상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1996년 나이지리아의 작은 도시 카노에서 뇌수막염이 유행했다. 6살 소녀 아나스는 뇌수막염에 걸렸으나 의료환경이 열악한 탓에 국제 의료지원 단체의 무료 진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들은 아나스를 비롯한 어린이들에게 세계 1위 제약회사 화이자(Pfizer)가 새로 개발한 뇌수막염 치료제 '트로반'을 투여했다.

 아나스는 뇌수막염이 나았지만, 이후 무릎을 움직일 때마다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 했다. 아나스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당시 소아 2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이 임상 시험에선 11명이 사망했고, 수십 명이 시력을 잃거나 뇌, 폐 등 장기에 손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비윤리적인 글로벌 임상시험 중 하나로 기록된 '코나 실험'이었다.

 2011년 국내 한 방송은 임상 시험에 참가했다 사망에 이른 사례 몇 건을 심층 보도했다. 병원과 제약회사가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사망과 약의 연관성은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했지만, 그 위험성에 경종을 울렸다. 임상 시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충분한 사전 설명과 피해보상 기준이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참가할 때 동의서를 작성했다는 이유로 정보공개를 거부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2011~2013년 임상 시험 중 '중대 이상 약물 반응'을 보인 경우는 476건에 달했다. 부작용으로 입원한 경우는 376건이다. 임상 시험 도중 사망하거나 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의 부작용이 발생한 경우도 56건이나 됐다.

 생동성 시험은 오리지널 약의 특허 기간이 끝난 뒤 복제약을 개발, 시판하는 과정에서 실시한다. 사례비는 통상 30만~40만 원 정도다.

 이미 오리지널 약에 대한 임상 시험을 마친 만큼 위험성이 낮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시험 참가자가 받는 신체적 부담은 적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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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동성 시험에 참가한 곽치환(가명)씨는 "사전에 어지럼증이나 구토 증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은 공지했으나 어떤 약인지,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지 않았다"며 "오히려 임상 시험까지 거친 약이라 안전하다는 점을 강조하니까 특별히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곽씨는 4~5번 생동성 시험에 참가하면서 쓰러진 사람을 2명 봤다고 했다. 그는 "허약체질로 보이는 친구가 피를 뽑은 뒤, 2~3시간 지났을 때 갑자기 쓰러져 간호사들이 응급 처치한 적이 있었다"며 "또 한 번은 친구 하나가 속이 자꾸 울렁거린다면서 힘들어하자 간호사가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했다"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임상시험 통합정보시스템'을 만들어 글로벌 제약기업과 공유하는 한편, 임상 시험 보험급여를 확대·적용할 계획이다.

 이경민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간사는 "정보 공유 과정에서 개인정보가 유출되고, 상업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며 "임상 시험 보험급여 확대는 국민 건강권 보장을 위해 사용해야 할 보험 급여를 제약사 이익에 쓰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마루타' 자처하는 청년들…"생활비·등록금 필요해서"

 임상 시험 아르바이트는 가난한 청년들에게 특히 유혹적이다. 위험성이 높지만, 그만큼 단기간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많은 돈을 벌 수 있어서다.

 대학내일 20대 연구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청년층 응답자의 16.3%가 고위험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는데 이 중 생동성 시험은 공사장·공장·조선소, 상하차·물류창고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고위험 아르바이트를 해봤다는 청년들은 '당장 생활비가 급해서'(35.8%), '쉽게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서'(26.4%), '짧은 시간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18.1%), '사고 싶은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10.4%), '학자금 또는 일반 대출 상환 시기가 다가와서'(1.0%) 등을 이유로 꼽았다. 생활비나 등록금, 학자금 등 당장 꼭 필요한 것과 관련된 응답이 과반(54.9%)이었다.

 대학생 오정현(가명.20대 초반)씨는 "그나마 생동성 시험은 임상시험보다 안전한 것 같았다. 돈이 급해서 참가한 것이니 위험성 같은 건 생각할 처지가 못됐다"며 "그냥 '돈을 버니까 기분이 좋다, 끝나면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참가자 10명 중 1~2명은 40~50대 아저씨들인데 '아, 이분들은 실업자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문득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나도 20년 후에 저 아저씨들처럼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도 들었다"고 토로했다.

 상황이 이런데 정부는 임상시험을 '저소득층' 또는 '난치성 질환자'들에게 확대하겠다고 밝혀 빈축을 사고 있다.

 이 간사는 "정부가 국민 건강과 생명을 제약사의 마루타로 삼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가난·질병에 지친 사람들과 'N포 세대' 청년들에게 몸을 담보로 돈벌이하라고 내모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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