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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앞 '종이박스 집'…홍승희 "너덜너덜한 국민의 삶"

등록 2016-01-22 06:00:00   최종수정 2016-12-28 16: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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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연합 홍승희 "청년주거빈곤 36%…집 찾아 유랑"

【서울=뉴시스】오동현 기자 = 지난 4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정문 앞. 금배지를 단 국회의원들이 드나드는 이곳에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면 날아갈 듯한 '종이박스 집'이 등장했다.

 집주인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수요시위에서 하얀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한일 위안부 협상 무효"를 주장하던 청년 예술인 홍승희(27·여)씨다.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홍씨는 "엉성하고 너덜너덜한 종이박스가 인간과 닮았다"며 "따뜻한 집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이 우리나라에선 대단한 꿈이라 슬프다"고 말했다.

 홍씨가 종이박스 집을 지은 계기는 지난해 12월 28일 타결된 한일 양국 간 위안부 협상 소식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소녀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불과 사흘 앞으로 다가왔던 인도여행을 취소했다.

 그는 "이미 살던 방까지 빼면서 여행 준비를 했던 것이었지만, 위안부 협상 타결 소식에 떠날 수 없었다"며 "당장 지낼 곳이 필요해 종이박스로 집을 짓고 '존재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고 설명했다.

 홍씨는 "존재의 집은 빈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끄러운 건 존재의 빈곤"이라며 "너덜너덜 엉성하고 서툴러 모든 사람이 쉬다 가는 인간의 최전선이자 내 존재의 최전선"이라고 말했다.

 현재 '존재의 집'은 국회의사당, 위안부 소녀상, 새누리당사, 서울시청 광장 등 인근에서 우리나라 청년 주거빈곤 문제를 풍자하고 있다. 구청에서 불법건축물 등으로 철거 요청이 올 때마다 이사 다니기 바쁘다.

 존재의 집 벽면에는 '나도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27살 RENT POOR(렌트푸어·치솟는 주택 임대비용을 감당하는데 소득의 상당액을 지출해 저축 여력이 없는 사람)' '청년주거빈곤율 36%' '집값이 너무 비싸요' 등의 글이 적혀있다.

 안에는 최대 4명까지 들어갈 수 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잠시 발길을 멈추고 집의 소중함을 체험한다. 더불어 '따뜻한 집에서 살고 싶어요'라는 글과 방명록을 남기곤 한다.

 홍씨는 "청년들이 남긴 메모를 보면 특히 마음 아프다. 이들이 원하는 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함께 살 수 있는 작은 공간"이라며 "이런 소박한 소망도 이루기 어려운 청년들의 현실이 안타깝고 비극적이다"고 호소했다. 

 실제 서울지역 청년(만 19∼34세) 5명 중 1명은 주택법 최저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지하나 옥탑, 고시원 등에서 사는 심각한 주거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지역 주거빈곤 청년은 2010년 기준 52만3869명으로 전체 청년 229만4494명 중 22.9%를 차지했다. 특히 청년 1인 가구 (34만 가구) 중 36.3%(12만3591가구)가 주거빈곤 상태였다.

 주거비 부담도 커지고 있다. '전셋값 폭등'에 '전세의 월세화' 추세로, 전·월세 난민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가계 주거비 지출이 작년 대비 23.5% 올라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실제 서울은 월세(보증금 제외)가 대학생 원룸 평균 42만원, 1.5평 내외 고시텔 20만~60만원, 쪽방도 20만원 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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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죽하면 서울시의회가 지난 2014년 12월 '서울시 청년 기본조례안'을 발의하면서 "청년들이 현재 겪고 있는 대부분 문제는 이미 청년들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꼬집었을 정도다.

 홍씨도 청년 주거빈곤층이다. 지방(강원 춘천시) 출신인 그는 작품 활동 등 바깥 일을 마치면 고시원으로 들어간다. 한 달 고시원비가 27만원인데도 방에 화장실이 없어 공동 화장실·샤워실을 이용해야 한다. 식사는 고시원에서 제공하는 밥과 김치로 때울 때가 많다.

 그는 "그나마 나는 외부활동을 많이 하니 괜찮은데, 주변 친구들은 많이 불편해한다. 특히 고시원에서 요리해 먹기 힘들어 통조림 등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는 친구들이 많다"고 토로했다.

 이어 "어떤 사람이 1000채 이상의 집을 갖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우리나라에 집이 남아돌아도 우리의 집은 없다"면서 "청년들은 아무리 일하고 노력해도 비싼 주거비 때문에 고시원 등으로 밀려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홍씨가 '존재의 집' 퍼포먼스를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청년 주거빈곤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라는 걸 환기하기 위해서다.

 그는 "청년들이 집을 구하기 힘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다. 총선을 앞두고 조금씩 청년 문제에 관해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평소에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사실 홍씨는 어린 시절 직업군인을 둔 아버지 곁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지금도 군무원으로 재직 중이다. 하지만 그가 스무 살 때 독립한 이후부터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은 거의 받지 않고 있다.

 홍씨는 "적어도 나는 어렸을 때 빈곤에 시달리진 않았던 것 같다.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이었기 때문에 내가 더 하고 싶었던 것들에 도전할 수 있었고, 두렵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이어 "빈곤에 시달리다 보면 돈을 버는 것이 꿈이 된다. 그래서 안정적인 환경이 중요한데, 정부는 하루 먹고 살기 바쁜 국민에게 창조경제만 외친다. 기본 환경만 보장해주면 창조경제는 국민이 자연히 해낼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불어 "정치인들이 공약만 잘 지켰으면 좋겠다. 역사도 거래하고, 상식을 지키지 않는 정부가 청년들의 삶을 지켜줄 리 만무하다"며 "정부가 상식을 회복할 수 있도록 청년들이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퍼포먼스와 예술 활동 등을 계속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홍씨는 국회 앞에서 펼치는 마지막 퍼포먼스로 국회의사당 잔디밭이 청년들의 종이박스 집으로 둘러싸인 합성사진, 국회의사당 지붕을 본떠 존재의 집 지붕을 꾸민 작품 등을 내놓을 계획이다.

 그는 "앞으로도 창조경제센터나 청와대 앞, 전두환 전 대통령 저택 근처 등 연대나 풍자 요소가 있는 현장에서 퍼포먼스는 계속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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