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리뷰]삶에 힘겨워해도 좋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하지만 정확히 21년 전의 뉴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근간을 흔든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부도의 날'은 국민들에게 가슴 아픈 일로 남아있는 IMF 사태를 한국 영화 최초로 다뤘다. 영화 '그날 밤의 축제'(2007), '스플릿'(2016)을 연출한 최국희(42) 감독의 신작이다. IMF 외환위기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OECD 가입' '아시아의 네 마리 용' 등 화려한 수식어로 연일 뉴스가 도배되던 1997년이 영화의 배경이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은 뉴스 내용과 달리 경제 재앙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사실을 윗선에 보고한 뒤 "현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대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번번이 반대에 부딪힌다. 정부는 뒤늦게 국가 부도 사태를 막기 위한 비공개 대책팀을 꾸리고, 한시현은 이 팀에 투입된다. 그러나 위기 대응 방식을 두고 '재정국 차관'(조우진)과 사사건건 대립한다. 시현의 의견을 묵살하고 국가 위기를 비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위기가 오히려 새로운 판을 짤 수 있는 기회"라면서 IMF와의 협상을 추진한다. 비밀리에 입국한 'IMF 총재'(뱅상 카셀)은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한국 정부를 옥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무능함과 구태의연한 관료주의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평범한 가장의 애환도 그려진다. 작은 그릇 공장을 운영하는 '갑수'(허준호)는 대형 백화점과 거래 계약을 하고 희망에 부푼다. 그러나 백화점의 부도로 현금 대신 받은 어음은 휴지 조각이 되고, 파산 직전에 이른다. 외환 위기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상징한다. IMF 구제금융의 대가는 혹독했다. 당시 청년들은 극심한 취업대란을 겪었으며, 근로자들은 정리해고·명예퇴직에 내몰렸다. 기업의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소비 심리마저 얼어 붙으면서 각종 산업활동 지표는 순식간에 악화됐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를 보면서는 힘들다고 해도 된다. 뼈아픈 기억을 그대로 소환하고 미화시키지 않았다. 힘든 일이 생기면 정신력이 아주 강한 사람도 힘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입체적인 캐릭터다. IMF 협상을 둘러싸고 인물간의 갈등과 대립이 있지만, 절대적인 선악을 나눌 수 없다. 각 인물은 자신의 이해관계와 신념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김혜수(48)는 어려운 경제 용어부터 시작해 영어 대사, 감정 연기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펼쳤다. 특유의 카리스마로 캐릭터의 전형성마저 탈피했다. 유아인(32)도 마찬가지다. 국가부도의 위기를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기 때문에 얄밉고 뻔하게 그려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아인은 달랐다.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면서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IMF 때와 마찬가지로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잔잔한 응원과 위로를 건넨다. 억지로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21년 전의 상황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 뿐이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인가' '집단과 개인의 가치가 충돌했을 때 어떤 것을 우선시해야 할까' '누군가 힘들게 털어놓은 이야기를 흔한 고민으로 여긴 것은 아닌가' '내 인생이 소중하듯이 다른 사람의 인생도 소중하지 않나' 등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28일 개봉, 114분, 12세 관람가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