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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뮤지컬계 가뭄의 단비, 4차원 감흥 '시티 오브 엔젤'

등록 2019-08-11 12:29:06   최종수정 2019-08-19 09: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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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레플리카 라이선스 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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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194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삼은, 낯선 블랙코미디 탐정 누아르물이 이처럼 강한 인력으로 작용하다니···.

8일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시티오브엔젤’ 얘기다. 국내 관객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대와 장르물에 대한 향수와 호기심이, 기억과 지성의 연안으로 밀려오는 환희를 만끽하게 해주는 수작이다.

무엇보다 ‘시티오브엔젤’은 가뭄을 겪고 있는 국내 뮤지컬 시장에 단비 같은 존재다. ‘썸씽로튼’, ‘스쿨오브락’ 같은, 새롭게 선보인 내한공연이 평단의 호평을 들었다. 하지만 라이선스, 창작물 중에서는 기존의 인기작이 되풀이됐을 뿐 주목할 만한 새로운 작품은 보기 힘들었다. ‘시티오브엔젤’이 이런 갈증을 해결해 줄 것으로 보인다.
  
장르 부분에서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탐정물을 차용했다. 주인공인 작가 스타인은 ‘스톤’이라는 사립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자신의 탐정소설을 영화 시나리오로 만드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잘나가는 영화 제작자 겸 감독 버디가 시나리오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고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작가적 정체성과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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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시티오브엔젤’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스타인의 세계와 그가 만든 스톤의 시나리오 속 세계가 교차된다는 것이다. 뮤지컬 ‘레드북’, 연극 ‘킬미나우’ 등 뮤지컬과 연극을 오가며 드라마가 강한 작품들을 선보인 오경택 연출을 낙점한 제작사 샘컴퍼니와 CJ ENM의 선택은 현명했다.

1989년 12월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시티오브엔젤’은 미국 토니워어즈와 드라마데스크어워즈, 영국 로런스 올리비에 어워즈 등을 석권한, 이미 검증 받은 라이선스물이다. 극중 현실과 영화 속 두 개의 이야기를 넘나드는 구성을 조명 등을 활용, ‘컬러’와 ‘흑백’이라는 ‘색의 대비’로 풀어낸다는 점도 높게 평가 받았다.

이번 한국 공연은 넌-레플리카(Non-Replica)다. 극본과 음악을 제외한 여러 요소들을 현지 프로덕션 상황에 맞게 수정이 가능하다. 오 연출을 비롯한 창작진은 극중 영화 속 이야기에 등장하는 배우들을 턴테이블 위에서만 이동하게 하고, 뮤지컬 가림막을 카메라의 조리개처럼 만드는 등 형식적 구조를 촘촘히 만들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웬만한 뮤지컬은 음악이 주가 되니, 드라마는 접어주고 가는 경우도 많은데 드라마까지 탄탄하다. ‘시티오브엔젤’은 스타인과 스톤의 버디 무비로, 이들의 성장담처럼 읽힌다.

스타인은 공연 중반까지 버디의 강요에 의해 개연성 없이 스톤과 그 주변 인물들을 써내려간다. 말도 안 되는 줄거리에 스타인이 창조한 스톤은 오히려 그에게 반발한다.

경지에 이른 작가들은 소설 속 인물을 본인이 창조했음에도 자신의 의지대로 다룬지 못한다고, 범인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종종 하는데, 이 뮤지컬이 그 답을 준다. 막판에 반대로 스톤이 타자기로 써내려가고, 스타인이 버디에게 애니메이션적인 통쾌한 복수를 할 때의 카타르시스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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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공연에서는 강홍석이 스타인, 테이가 스톤으로 나섰다. 솔풀한 가창력이 이미 증명된 강홍석은 이번에 연기력까지 확실히 보여준다.

‘데스노트’의 사신 ‘류크’, ‘모래시계’의 비열한 ‘종도’, ‘킹아더’에서 아서에 맞서며 야망에 불타는 ‘멜레아강’ 등 강렬한 인물들이 그의 몫이었다. 스타인은 평범하고 갈팡질팡하며 끊임없이 자기에 대한 확신을 확인하지만, 꿈을 갖고 있고 부당한 현실을 이겨내려는 노력과 고민을 하는, 공감할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강홍석은 현실 연기를 선보이며 객석에 공감대를 형성한다.

테이는 한량으로 애니메이션 성격이 뚜렷한 캐릭터인 스톤을 너스레와 능청으로 잘 소화해낸다. 또 다른 스타인은 최재림인데 그도 강홍석 못지 않게 개성 강한 인물들을 연기해온 터라 변신이 기대된다. 이지훈이 또 다른 스톤이다. ‘발라드 황태자’ 테이, ‘발라드 왕자’ 이지훈의 능청도 볼 거리다.
      
극 중 스타인을 돕는 유능한 여자친구 ‘게비’, 스톤의 든든한 지원군인 바비의 비서 ‘울리’ 등 여성 캐릭터도 톺아볼 만하다. 스타인과 스톤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제외하고 극 중 주조연급 배우들은 1인2역이다.

게비와 영화 속 스톤의 전 애인인 가수 '바비' 역을 맡은 방진의, 울리와 스타인을 사랑한 버디의 비서 ‘도나’를 연기하는 박혜나, 버디의 아내 ‘칼라 헤이우드’와 스톤을 음모에 휘말리게 하는 팜 파탈 캐릭터 ‘어로라 킹슬리’ 역을 나눠 맡는 백주희, 버디와 극 중 영화계 거물 ‘어윈 어빙’ 역을 동시에 맡는 임기홍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김문정 음악감독이 지휘하는 18인 빅밴드에서 내뿜는 음악을 이야기해야 할 차례다. 음악은 1940년대 할리우드색을 물씬 풍기는 화려한 스윙 재즈 넘버를 내세운다. ‘더라이프’ ‘스위트 채리티’ ‘포시’ ‘바넘’ 등을 작곡한 미국 싱어송라이터 사이 콜먼이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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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은 ‘키스 미 케이트’,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빅밴드와 함께 재즈를 경험했다. 전반적으로 넘버수가 적지만 김 감독과 빅밴드가 만들어내는 화성이 전반에 깔리며 고전적이고 도회적이며 세련된 그루브를 만들어낸다. 선율이 뇌를 성냥개비가 돼 긋고 지나간 것처럼, 틈을 주지 않고 번쩍번쩍거린다.

뮤지컬의 배경인 LA를 현재 대표하는 대중문화는 아마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일 것이다. LA는 18세기 후반 스페인이 인디언들이 살던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천사들의 도시’로 불렸다. 다른 문화의 충돌, 인종 차별 등 갈등도 존재하지만 그래도 다양성과 포용의 도시로 통한다.

뮤지컬은 흑백 영상으로 LA 곳곳을 동시에 보여준 동시에 특정 가사 없이 즉흥적으로 음을 부르는 ‘스캣’ 등에 특화된 보컬 4명도 ‘천사들의 도시’의 노래를 들려준다. 제작사는 이들을 ‘엔젤’로 명명했다. 말 그대로 천사들의 도시다.

좋은 작품은 공감과 동경을 동시에 안긴다. ‘시티오브엔젤’은 낯선 장르를 인물들의 성장담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LA에 가고 싶은 마음을 굴뚝같게 한다. 스타인의 2차원 텍스트는 3차원의 공연장을 거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4차원을 꿈꾸게 한다.뮤지컬은 시간과 공간의 예술이지만, 물리적인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흥을 만들어낸다.

커튼콜을 마무리하는 것은 주연 배우의 시그니처 포즈가 아닌, 김 감독과 빅밴드다. 정말 신나서 몸을 좌우로 오가는 김 감독의 흥미로운 모습과 빅밴드의 고급 사운드를 듣고 있노라면  자각몽 같다. 그리고 연주가 끝나면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아티스트’(2012)의 마지막에 느낀 감흥, 비슷한 것이 찾아온다. 흑백이던 세상에서 색깔을 되찾은 기분, 그것은 나만의 장르를 만들어 일상을 내 방식대로 노래하고 싶은, 즉 스타인의 마음이다. 공연은 10월2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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