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반경 넓힌 노태우 북방정책…유엔 가입, 남북 관계 규정
탈냉전 북방외교…한·소 수교 등 일대 전환해빙 기조 속 남북 유엔 동시 가입 숙원도남북 관계 대변혁…단계적 통일 방향 마련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도
특히 소련과의 수교 등은 한국 외교사에서 일대 전환점으로 기억되고 있다. 나아가 공식,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이뤄진 대북 접근은 8회에 걸친 남북 고위급 소통, 상호 관계 합의라는 유의미한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북방외교에 유엔 가입…한국, 본격 국제무대로 노태우 정부는 1980년 후반부터 진행된 동서 데탕트와 냉전 체제 해체 분위기 속에서 북방외교를 전개했다. 이는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등 한국의 외교 반경을 크게 넓히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되고 있다. 우선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2월 취임사에서 북방정책을 천명하고 같은 해 7·7 선언을 통해 이를 공식화 했다. 또 1989년 초부터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구권 국가들과 외교 관계가 수립됐다. 아울러 1990년 6월4일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 전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 사이 사상 첫 한·소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역사적 한·소 정상회담은 '태백산'이라는 암호명으로 극비 진행됐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은 한·소 관계 정상화 시 사절단 철수 등 위협을 하면서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한국과 소련은 정상회담 후 넉 달도 지나지 않은 1990년 9월30일 유엔 본부에서 국교를 수립했다. 나아가 한국은 유엔 가입이라는 숙원도 이뤘다. 앞서 한국은 1949년 1월 유엔 문을 두드렸으나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소련 거부권 행사로 좌절, 이후 가입 시도도 번번이 실패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 대한 국제적 지지가 확산하고 소련과 동구권까지 동참하게 되면서 1991년 9월 46차 유엔 총회 개막 첫 날 한국은 161번째, 북한은 160번째 유엔 회원국에 이름을 올렸다. 북방외교는 1992년 8월 중국과의 수교로도 이어졌다. 같은 해 9월 노 전 대통령은 한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찾았다. 한중 수교까지 이뤄지면서 우리 활동 무대는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로 넓어진 셈이다.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남북 관계도 일대 전기를 맞았다. 북방외교와 해빙 기조, 자주적 대외 행보에 대한 자신감은 남북 관계의 성격을 규정하고 방향성을 합의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우선 북방정책 구체화는 7·7 선언을 통해 이뤄졌다. 남북 관계 측면에서 7·7 선언은 민족 공동체 관계 발전을 통한 통일 실현이라는 방향을 제시한 정책 선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후 남북 경제 개방 조치가 이뤄졌으며 1989년 6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지침이 마련됐다. 또 1990년 8월에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남북교류협력법)을 제정, 남북 협력 토대가 조성됐다. 나아가 1989년 9월 자주, 평화, 민주 3원칙과 단계적, 점진적 통일을 제시하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발표됐다. 이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으로 이어졌고 공식 통일 방안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 해빙 분위기 속에서 1990년 9월~1992년 9월 서울과 평양에서 8회에 걸친 고위급 회담이 이뤄지는 등 남북 소통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1991년 12월 '남북 기본합의서', 1992년 1월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 채택이 이뤄지기도 했다. 특히 남북 기본합의서는 상호 존중, 인정 아래 이뤄진 합의로 관계 근간을 조성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남북 화해와 불가침, 다각적 교류 협력 실현이 다뤄졌으며 쌍방은 국가 간 관계가 아닌 통일 지향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라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다만 1993년 들어 1차 북핵 위기 등 남북 사이에는 긴장 국면이 도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부 기간 남북 소통이 관계 개선의 토대를 마련한 유의미한 지점이었다는 데는 이견이 크지 않은 편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