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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 고문서에 담긴 111세 노비의 비밀

등록 2023-03-11 06:00:00   최종수정 2023-03-13 10: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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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역사 컬렉터, 탐정이 되다'. (사진=휴머니스트 제공) 2023.01.27.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천안 외곽의 한적한 책방인 노마만리로 책 한권이 배달돼 왔다. 올 초 발간된 박건호 선생의 ‘역사 컬렉터, 탐정이 되다’이다.

페이스북을 통해 출간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한번 읽어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렇게 저자에게 책을 직접 선물 받게 될지 생각하지 못했다. 박 선생과 나는 그저 페이스북 친구로 서로의 포스팅에 ‘좋아요’를 누르는 정도의 친밀함만 있었을 뿐 통화를 해본 적도, 만나본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뜻밖의 선물이었다.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읽고 싶었던 책을 받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박 선생이 보낸 소포를 받은 나는 어느 때보다 기뻤다. 들뜬 마음으로 얼른 포장을 풀어 책을 펼쳐 보았다. 오래된 문서, 장부, 사진 등을 가지고 그 시대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골동 취미를 가진 내게는 목차만 보아도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책은 어렵지 않아 술술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용이 빈약하진 않았다. 그의 글은 수집품의 금전적 가격과 같은, 호사가의 관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한편의 잘 짜인 탐정소설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들의 연속이었다. 마치 탐정이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는 것과 같이 수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파헤쳐 나갔다.

예컨대 첫번째 이야기는 하동 류씨 가문의 호구단자와 호적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 문서들에는 죽지 않는 111세 노비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다. 박 선생은 문서상에라도 노비를 거느리고 있다고 기록하는 것이 그 당시 몰락한 양반들의 위신을 세우는 관행이었기에 가상의 인물을 기재했거나, 도망간 노비의 소유권을 훗날 주장하기 위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어도 끝까지 호적에 기록했을 것이라 말한다.

읽다 보면 자연스레 조선 말기 호적제도와 신분제의 동요, 도망 노비, 몰락한 양반의 삶 등이 눈앞에 그려진다. 나 역시 구한말 작성된 어느 형제의 호적표를 수집해 가지고 있는지라 하동 류씨 호구단자 이야기가 보다 흥미롭게 다가왔다. 낱장으로는 알 수 없는, 수십 장의 자료가 모여 만든 백여년간의 이야기는 그 시대를 더 풍성하게 보여준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관행이라 중요하게 기록되지 않아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사실들은 어찌 보면 하찮은 자료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박 선생의 책이 주는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이런 자료들을 통해 한 시대의 풍경을 그려낸다는 점이다.

박 선생은 책의 머리말에서 자신을 ‘골동품 수집가’가 아닌 ‘역사 컬렉터’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인지 책에 소개된 컬렉션은 자랑할 만큼 금전적 가치가 높거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미 없어 보이는 자료들은 박 선생의 글을 통해 스스로 그 가치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모두 흥미진진하다.

책을 읽고 나니 박 선생은 역사 컬렉터일 뿐만 아니라, 하찮아 보이는 물건 속에서 숨어 있는 이야기를 꺼내 흥미진진하게 들려주는 천생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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